“키스는 왜 뛰고 있어?” 오늘은 좀처럼 의미 모를 일만 잇따르고 있었다. 쪽지에 쓰인 주제도, 갑자기 멈춰버린 시간도, 이 사람이 던지는 질문의 의도도. 상황에 대한 이해는 여전히 어려웠으나, 키스는 복잡한 생각을 그만두고 이 질문이라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했다. 달리는 이유라.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자면 디노가 억지로 물건 빌리기 경주에 자신을 내보낸 것이 근원이었다. 지금 달리고 있는 것도 눈앞에 있는 디노를 닮은 인물이 함께 달리자고 부추겼기 때문이었다.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즉, “디노 때문에.” 그는 잠시 놀란 얼굴로 멈칫했다가 금방 웃음을 터뜨렸다. “아~ 그랬지, 그랬어.” 이렇게 드라마틱하게 바뀌는 표정을 보면 역시 이 사람도 디노가 맞기는 한 것 같다고 키스는 남몰래 생각했..
“키스, 공 좀 던져줘!” 저편에서 키스를 부르며 다가오는 인물은 웃는 얼굴도, 달리는 자세도, 키스를 부르는 목소리마저도 디노와 완벽히 일치했다. “디노?” 키스는 어딘가 형용하기 어려운 위화감이 들었으나, 그 의문은 그를 가까이 마주하자 금세 풀렸다. 키스가 올려다봐야 할 정도로, 그는 키가 컸다. 키스는 야구공과 디노와 닮은 어른을 번갈아 쳐다보며 혼란스러움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하아, 모처럼 넷이 모여서 캐치볼 하던 중이었는데. 키스가 엉터리로 던지는 바람에 여기까지 굴러왔네.” 내가? 넷이라니 누구? 키스는 되물을지 말지를 고민하다가 결국 입을 열지 못했다. 그는 키스의 발 밑에 떨어진 공을 태연하게 주워 들었다. 그리고는 상황을 따라가지 못하고 어지러워하는 키스와 눈을 바로 마주치며 부드러..
쪽지가 놓인 테이블이 보였다. 저 안에 빌려와야 할 주제가 쓰여져 있었다. 잠시 선택을 망설이던 키스는, 여기서 신중하게 고민한들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과감하게 손을 뻗어 쪽지를 펼쳤다. 시원시원하게 골라낸 것까지는 좋았으나, 자기가 고른 주제를 마주한 키스는 얼빠진 얼굴로 글씨를 더듬었다. “이런 게 왜 쓰여 있어? 애초에 가져올 수 있는 게…….” 키스는 되는대로 주변을 살폈다. 뒤늦게 속도를 내기 시작했던 키스는 주제를 고르는 구간까지 일찍 도착한 편은 아니었지만, 먼저 도착한 이들 중에서도 의외로 물건을 덥석 빌리러 가는 사람은 없었다. 다른 녀석들이 어떤 걸 뽑았는지는 알 도리가 없었으나, 안경이라거나 손목시계라거나 하는 흔해빠진 주제는 쏙 빼고 온갖 난해한 단어가 출제된 듯했다. 키스..
키스는 자기를 앞질러 가는 아이들을 좇으려는 투지도 없이 트랙을 따라 기계적으로 다리를 움직였다. 구경하는 사람들을 위해 설치된 간이 천막 아래로 많은 이들의 시선이 날아와 꽂혔다. 그러나 속도만으로 승부를 내는 경주가 아니었으므로, 훈련의 일종으로 운동장을 도는 것보다는 되려 부담이 덜했다. 훈련이었다면, 하위 세 명은 어김없이 운동장 세 바퀴를 추가로 돌아야 했을 터다. 팀 점수가 걸려있기는 했으나, 어차피 같이 출전하는 사람 중에도 같은 팀인 아이들이 있었다. 그들이 먼저 골인해서 점수를 얻어준다면, 키스가 가장 늦게 골인하더라도 점수에는 영향이 없으니 아무도 키스를 원망하지 않을 것이다. 훈련하던 때처럼 키스 본인에게 주어지는 불이익도 없었다. 키스는 여유롭게 달리면서 함성을 들었다. 키스에게는 ..
*마지막 문장에 다음 편 링크가 걸려있습니다. “제자리에 준비~” 곧 터져 나올 총성을 지레 상상하고 키스는 벌써 인상을 찡그렸다. 체육대회라고 몸소 나서 땀을 흘릴 생각은 없었는데. 체육대회가 열린다는 소식에 키스는 전혀 들뜨지 않았다. 하루 치 수업을 듣지 않아도 된다는 점만은 썩 나쁘지 않은 듯했으나,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세워진 ‘반드시 한 가지 이상의 종목에 참가’라는 조건을 요령 좋게 피할 궁리로 머리가 소란스러웠다. 사실 궁리랄 것까지도 없었다. 순수한 실력을 보여서 선수로 발탁되는 사태를 막기 위해 예선 경기를 무성의하게 달리는 것이 키스가 보일 수 있는 최선의 반항이었다. 보는 사람까지 의욕이 떨어지는 걸음걸이로 운동장을 서성인 덕분에 키스의 농땡이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
#디노키스_스터디 12월 주제: [크리스마스] Jilllian Edwards - All My Christmases https://youtu.be/5chG9QSyjcw 함께하기에 경험할 수 있는 기적 같은 순간은, 때로는 비현실보다 훨씬 비현실적이다. 웨스트 섹터의 떠들썩한 크리스마스도 저물어가고 있었다. 히어로들에게 있어서 휴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일정을 마무리 지은 이후에 귀한 시간을 쪼개 모여서 저마다 취향껏 고른 토핑을 얹어 피자를 만드는 정도는 함께할 수 있었다. 타워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얼마 남지 않은 12월 25일에 대한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오늘의 피자파티는 크리스마스를 테마로 한 영화와 함께 개최되었다. 제목에 크리스마스가 들어간다는 이유로 선정한 영화는, 등장인물들이 노래를 부르는 장..
어둠에 벼려져 예민해진 감각으로 세상을 더듬으면, 예전에는 미처 보지 못하고 지나쳤던 것들과 마주할 수 있다. 도시의 가로등 불빛에 묻혀있던 달무리,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갈 곳을 잃었던 따스한 손, 싸라기눈처럼 소리도 없이 내려앉은 감정의 이름. 금방이라도 눈이 내릴 듯한 보랏빛 하늘에서는 살얼음 냄새가 났다. 산속에 내려앉은 밤공기는 두드러지게 차가웠다. 키스는 추위를 달래기 위해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발을 굴렀다. 두 번째 방문한 디노의 본가는, 반소매를 입고 놀러 왔을 때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매서운 바람을 맞고 있었다. 사랑이 넘치는 가정의 노부부는 첫 번째 방문과 마찬가지로 따뜻한 음식과 잠자리를 내어주었지만, 친절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남은 망설임 탓인지 키스는 좀처럼 잠을 이룰 수가 ..
만약 천사가 한 가지 소원을 이루어 준다고 한다면 나는……. 트레이닝룸에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진 김에 그냥 드러누워 버렸다. AA가 다 뭐냐. 승격 시험 준비하다가 당장 죽게 생겼는데. 타워 밖은 아직 꽤 더웠어도 트레이닝룸은 격하게 움직이다가 더위 먹어 쓰러지는 놈들이 없도록 늘 적절한 온도로 냉방이 돌고 있을 터였다. 그런데도 차가운 바닥에 드러누워 열기를 식히는 행위가 무색할 정도로, 온몸에서 줄줄 새어나가는 땀은 멎을 줄을 몰랐다. 그뿐인가. 급기야 시야가 흑백으로 번쩍이더니, 눈앞에 거대하고 흰 날개를 펄럭이는 무언가가 아른거렸다. 후광이 지나치게 밝은 탓에 되레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가상의 세계를 배경으로 만든 작품에서 흔히 나오는, 천사를 표현하는 방식과 매우 흡사했다. 정면으로 뙤약볕을..
키스는 추락하고 있었다. 어디가 위이고 아래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었다. 그나마 등 쪽으로 떨어지고 있음을 미루어볼 때, 지금 시야에 담긴 풍경이 위쪽일 터였다. 그렇게 멋대로 하늘이라고 정의한 저편은 거품 토핑조차 올리지 않은 딸기라떼 색을 하고 있었다. 어디서부터 떨어지기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정신이 들었을 때는 이미 아래로 곤두박질치는 중이었다. 무척 빠른 속도로 떨어지고 있는 것 치고는 위기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상황에 비해 긴박감이 전혀 없었다. 보기만 해도 혀끝이 달짝지근해지는 분홍색 하늘 탓일까. 아니면 얼굴에 닿는 바람이 애정이 어린 숨결처럼 뺨을 간질이기 때문일까. 도무지 현실감을 찾을 수 없는 풍경에 키스는 되려 평온해진 마음으로 눈을 감고 기억을 더듬었다..
유한하기에 무한히 아름다운 순간을 우리는 몇 번이고 넘어왔다. 그렇게 사람들은 짧은 순간 빛을 발하는 필름을 이어붙인 장편영화 속에서 살아간다. 디노는 할인매장의 비닐봉지를 들고 계단에서 튀어 오르듯이 달려가 캄캄한 옥상 한가운데에 쪼그리고 앉았다. 키스는 맥주캔을 하나 들고 디노의 뒤를 따라 느긋하게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두 사람이 사는 건물 옥상은 텐트를 치고 캠핑을 하기에도, 누군가를 불러 바비큐를 하기에도, 하다못해 화분을 돌보기에도 애매하게 좁아 여가를 즐기기엔 마땅치 않았다. 여름밤에 옥상에서 할 수 있는 유흥이라고 해봐야 냉장고에서 갓 꺼내온 맥주를 홀짝이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런데도 디노는 한껏 흥이 나서 낮에 산 물건이 든 봉지를 뒤적거렸다. 키스는 그런 디노를 흘끗 쳐다보고는 그대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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