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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둠에 벼려져 예민해진 감각으로 세상을 더듬으면, 예전에는 미처 보지 못하고 지나쳤던 것들과 마주할 수 있다. 도시의 가로등 불빛에 묻혀있던 달무리,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갈 곳을 잃었던 따스한 손, 싸라기눈처럼 소리도 없이 내려앉은 감정의 이름.



   금방이라도 눈이 내릴 듯한 보랏빛 하늘에서는 살얼음 냄새가 났다.



   산속에 내려앉은 밤공기는 두드러지게 차가웠다. 키스는 추위를 달래기 위해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발을 굴렀다. 두 번째 방문한 디노의 본가는, 반소매를 입고 놀러 왔을 때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매서운 바람을 맞고 있었다.

   사랑이 넘치는 가정의 노부부는 첫 번째 방문과 마찬가지로 따뜻한 음식과 잠자리를 내어주었지만, 친절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남은 망설임 탓인지 키스는 좀처럼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산속의 겨울이 유독 혹독하다는 얘기야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잠시 바람이라도 쐬면 속이 뚫릴까 싶어 기껏 밖으로 나와봤더니, 상상 이상의 추위에 마음이 꺾일 뿐이었다.

   저녁까지는 소란스러웠던 집은 방금까지의 온기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쥐 죽은 듯 고요했다. 달과 별도 구름에 몸을 감춘 흐린 하늘에, 불이 꺼진 집. 산속에 가로등이 있을 리도 만무했으니 캄캄한 굴에 빠져 길을 잃은 기분이었다.

   그나마 늘 앞머리에 덮여있던 한쪽 눈이 어둠에 익숙한 덕분에 시야가 까마득한 와중에도 사람을 깨우지 않고 살금살금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고 키스는 생각했다.

 

 

 

   “……키스?”

 

 


   뜻밖의 타이밍에 들린 목소리에 놀란 키스는 드물게 큰 동작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빛이 없는 탓에 사람의 윤곽이 선명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목소리는 디노의 것이 틀림없었다. 멀찍이서 보아하니 졸린 듯 눈을 비비고 있으면서도, 잠결에 용케 겉옷은 걸치고 나온 것 같았다. 디노는 추위가 안으로 들이치지 않게 문을 닫고, 금방 다시 들어갈 요량으로 여전히 현관 가까이에 서 있었다. 혹은, 어둠 속에서 키스의 정확한 위치를 가늠하지 못했기 때문에 다가설 수 없을 뿐일지도 몰랐다.

 

 

 

   “내가 깨웠어?”
   “아니, 화장실 가려고 일어났는데 키스가 없길래.”

 

 

 

   모습이 선명하게 보이지 않아도 목소리는 문제없이 주고받을 수 있었다. 키스는 디노의 다음 말을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었다.

 

 


   “잠이 안 와?”



   추측한 그대로 이어진 디노의 질문에 키스는 입을 다물고 머릿속으로 대답을 골랐다. 기껏 마련해준 잠자리가 불편하다는 오해를 주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니, 나도 화장실 가려고 일어났다가 바람 쐬러 나와본 거야.”
   “아하.”

 

 


   흔히 무언가를 이해했을 때 나오는 추임새와는 대조적으로, 디노의 의아함은 깔끔하게 해소되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디노는 추위에 어깨를 들썩이다가 아직 의문이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물었다.

 

 


   “뭔가 보고 있었어? 어두워서 아무것도 안 보이잖아. 날도 흐렸고.”

 

 


   전부 맞는 말이었다. 화장실을 가려다가도 들어가고 싶어지는 추위에 굳이 바람을 쐬고 싶어서 나오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아마 디노도 그 점을 궁금히 여겨 던진 질문이었을 터다. 키스는 ‘무언가 보고 있었냐’에 초점을 두고 대답할지, ‘아무것도 안 보이잖아’에 이어지는 대답을 할지 고민했다.

 

 

 

   “밤눈은 밝은 편이라서.”
   “오, 그건 처음 듣는 얘긴데?”

 

 


   키스의 대답에 졸음이 가셨는지 디노는 흥미에 찬 목소리로 경쾌하게 대답했다. 이 주제를 가지고 얘기를 이어가고 싶다는 신호였다. 디노는 서 있던 자리에서 벗어나 키스가 있는 곳으로 조심스레 걸음을 옮기려고 했다.

 

 

 

   “키스, 어딨어?”

 

 


   어둠 속이라 한들 이미 셀 수 없이 거닐었을 마당에 발을 디디는 건 두려울 게 없었다. 다만 그곳에서 어디 서 있을지 모를 사람을 찾아야 한다면 이야기가 달랐다. 그렇다고 사람을 찾을 방법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남다른 청각과 후각으로 위치를 파악하려는 속셈이었다.

 

 


   “나 이제 들어갈 거야.”

 

 

   디노의 그런 속내를 키스가 알 턱이 없었다. 애초에 그런 꿍꿍이는 고사하고, 디노의 감각이 인간을 뛰어넘는 줄은 몰랐던 키스는, 디노가 넘어지기라도 할까 불안해져 가만히 있으라는 말 대신 자기가 움직이겠다는 의사를 빙 돌려 밝히고 디노에게 향했다.

   그런데도 디노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목소리와 발소리로 키스의 위치를 알아냈으니 굳이 멈출 이유가 없었으므로.

 

 

 

   “키스, 뭘 보고 있었어? 밤눈이 밝으면 어떤 게 보여?”
   “주변에 아무것도 없어서 별거 안 보여. 아니, 가만히 있으라니까?”

 

 

 

   좀처럼 말을 들어주지 않는 디노의 움직임을 막기 위해 키스는 손을 뻗어 디노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키스가 자신의 돌발적인 행동에 당황할 틈도 없이, 디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키스를 응시했다. 디노보다 한참 전에 나온 키스의 손은, 주머니에 넣고 있었다고 해도 절대 따뜻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맞닿은 피부 너머로 전해지는 온기 이상의 감정이, 따스했다.

 

   불쑥 디노와 시선이 맞은 키스가 눈 둘 곳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사이에 디노는 고개를 들었다. 구름을 걷고 내려온 달빛에 시야가 서서히 트였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어둠에 벼려져 예민해진 감각으로 세상을 더듬으면, 예전에는 미처 보지 못하고 지나쳤던 것들과 마주할 수 있다. 도시의 가로등 불빛에 묻혀있던 달무리,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갈 곳을 잃었던 따스한 손, 싸라기눈처럼 소리도 없이 내려앉은 감정의 이름.

 

 

 

   괜한 말을 덧붙이면 오해를 살 것 같았다. 키스는 말없이 디노의 손목을 놓았다. 한 순간의 일이었는데도 시간이 무척 더디게 흐른 것 같았다. 디노는 작게 환호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우와! 첫눈이다!”

   “…나 진짜 들어간다.”

 

 

 

   키스의 등과 달빛을 받으며 떨어지는 눈을 번갈아 쳐다보던 디노는, 눈도 마주치지 않고 현관으로 향하는 키스와 약간의 거리를 두고 천천히 뒤따라 걸었다.

 

   키스가 어둠 속에서 본 것들을, 디노도 어렴풋이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좀처럼 다시 잠들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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