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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쪽지가 놓인 테이블이 보였다. 저 안에 빌려와야 할 주제가 쓰여져 있었다. 잠시 선택을 망설이던 키스는, 여기서 신중하게 고민한들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과감하게 손을 뻗어 쪽지를 펼쳤다.

   시원시원하게 골라낸 것까지는 좋았으나, 자기가 고른 주제를 마주한 키스는 얼빠진 얼굴로 글씨를 더듬었다.

   “이런 게 왜 쓰여 있어? 애초에 가져올 수 있는 게…….

   키스는 되는대로 주변을 살폈다. 뒤늦게 속도를 내기 시작했던 키스는 주제를 고르는 구간까지 일찍 도착한 편은 아니었지만, 먼저 도착한 이들 중에서도 의외로 물건을 덥석 빌리러 가는 사람은 없었다. 다른 녀석들이 어떤 걸 뽑았는지는 알 도리가 없었으나, 안경이라거나 손목시계라거나 하는 흔해빠진 주제는 쏙 빼고 온갖 난해한 단어가 출제된 듯했다.

   키스는 다시 고개를 숙여 글자를 노려보았다. 교사 측에서 이렇게 아무런 단어나 써서 내놓을 거면 이쪽도 아무거나 들고 가도 상관이 없지 않나? 머리를 굴리다 보니 주변에서 들려오던 온갖 소음마저 더는 들리지 않았다.

 



   뭐야?”

   쪽지를 들고 끙끙대던 키스의 발밑으로 야구공이 도로록 굴러왔다. 누군가가 빌려오던 도중에 놓친 것일지도 몰랐다. 야구공을 들고 경주를 관전하는 사람은 드물 테지만, 저편의 체육 창고까지 가면 가져오지 못할 것도 없었다. 이렇게 직관적인 주제를 뽑은 녀석은 상당히 운이 좋았을 것이다. 키스는, 물론 행동으로 옮기진 않을 테지만, 이걸 멀리 던져버릴까 갈등하며 공을 주워들어 고개를 들었고,

 



   자기만 다른 공간에 똑 떨어진 것처럼, 자기 이외의 모든 사람이 그 자리에 정지해 있음을 확인했다.

 



   달리던 사람들도, 객석에서 손을 흔들던 사람들도, 모두가 제자리에 굳어 있었다. 키스를 제외한 모든 이들의 시간이 멈춰 있었다.

 

   엉터리로 출제된 주제보다 훨씬 당혹스러운 현실에 키스는 그만 쥐고 있던 공을 놓치고 말았다. 야구공은 다시 힘없이 짧은 거리를 구르다가 이내 정지했다.



   그리고 멈춘 시간 속에서, 그 공을 주우러 키스의 뒤에서 손을 흔들며 달려오는 사람이 있었다.




   그 발소리에,
   키스는 뒤를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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