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스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디노의 손목을 잡고 디노를 운동장으로 끌어냈다. 좀처럼 자신이 가져와야 할 물건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아이들 사이에서, 용감하게 객석으로 뛰어든 키스에게 보내는 환호가 터져 나왔다. 디노는 키스가 손을 뻗는 순간까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다가, 조만간 이해했다는 듯이 벌떡 일어서 키스와 함께 트랙을 달리기 시작했다. 키스는 별다른 설명은 덧붙이지 않았다. 어떤 주제를 뽑았는지조차 알려줄 마음이 없었다. 골인 테이프를 향해 직진하는 키스의 옆얼굴을 들여다 보며, 디노가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주제로 ‘제일 친한 친구’라도 나온 거야!?” 기대에 찬 목소리였으나, 정답은 아닌 듯했다. 키스는 숨을 몰아쉬며 간신히 대답했다. “아니거든. 네가 나 혼자 뛰게 만든 게 괘씸..
“키스는 왜 뛰고 있어?” 오늘은 좀처럼 의미 모를 일만 잇따르고 있었다. 쪽지에 쓰인 주제도, 갑자기 멈춰버린 시간도, 이 사람이 던지는 질문의 의도도. 상황에 대한 이해는 여전히 어려웠으나, 키스는 복잡한 생각을 그만두고 이 질문이라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했다. 달리는 이유라.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자면 디노가 억지로 물건 빌리기 경주에 자신을 내보낸 것이 근원이었다. 지금 달리고 있는 것도 눈앞에 있는 디노를 닮은 인물이 함께 달리자고 부추겼기 때문이었다.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즉, “디노 때문에.” 그는 잠시 놀란 얼굴로 멈칫했다가 금방 웃음을 터뜨렸다. “아~ 그랬지, 그랬어.” 이렇게 드라마틱하게 바뀌는 표정을 보면 역시 이 사람도 디노가 맞기는 한 것 같다고 키스는 남몰래 생각했..
“키스, 공 좀 던져줘!” 저편에서 키스를 부르며 다가오는 인물은 웃는 얼굴도, 달리는 자세도, 키스를 부르는 목소리마저도 디노와 완벽히 일치했다. “디노?” 키스는 어딘가 형용하기 어려운 위화감이 들었으나, 그 의문은 그를 가까이 마주하자 금세 풀렸다. 키스가 올려다봐야 할 정도로, 그는 키가 컸다. 키스는 야구공과 디노와 닮은 어른을 번갈아 쳐다보며 혼란스러움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하아, 모처럼 넷이 모여서 캐치볼 하던 중이었는데. 키스가 엉터리로 던지는 바람에 여기까지 굴러왔네.” 내가? 넷이라니 누구? 키스는 되물을지 말지를 고민하다가 결국 입을 열지 못했다. 그는 키스의 발 밑에 떨어진 공을 태연하게 주워 들었다. 그리고는 상황을 따라가지 못하고 어지러워하는 키스와 눈을 바로 마주치며 부드러..
쪽지가 놓인 테이블이 보였다. 저 안에 빌려와야 할 주제가 쓰여져 있었다. 잠시 선택을 망설이던 키스는, 여기서 신중하게 고민한들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과감하게 손을 뻗어 쪽지를 펼쳤다. 시원시원하게 골라낸 것까지는 좋았으나, 자기가 고른 주제를 마주한 키스는 얼빠진 얼굴로 글씨를 더듬었다. “이런 게 왜 쓰여 있어? 애초에 가져올 수 있는 게…….” 키스는 되는대로 주변을 살폈다. 뒤늦게 속도를 내기 시작했던 키스는 주제를 고르는 구간까지 일찍 도착한 편은 아니었지만, 먼저 도착한 이들 중에서도 의외로 물건을 덥석 빌리러 가는 사람은 없었다. 다른 녀석들이 어떤 걸 뽑았는지는 알 도리가 없었으나, 안경이라거나 손목시계라거나 하는 흔해빠진 주제는 쏙 빼고 온갖 난해한 단어가 출제된 듯했다. 키스..
키스는 자기를 앞질러 가는 아이들을 좇으려는 투지도 없이 트랙을 따라 기계적으로 다리를 움직였다. 구경하는 사람들을 위해 설치된 간이 천막 아래로 많은 이들의 시선이 날아와 꽂혔다. 그러나 속도만으로 승부를 내는 경주가 아니었으므로, 훈련의 일종으로 운동장을 도는 것보다는 되려 부담이 덜했다. 훈련이었다면, 하위 세 명은 어김없이 운동장 세 바퀴를 추가로 돌아야 했을 터다. 팀 점수가 걸려있기는 했으나, 어차피 같이 출전하는 사람 중에도 같은 팀인 아이들이 있었다. 그들이 먼저 골인해서 점수를 얻어준다면, 키스가 가장 늦게 골인하더라도 점수에는 영향이 없으니 아무도 키스를 원망하지 않을 것이다. 훈련하던 때처럼 키스 본인에게 주어지는 불이익도 없었다. 키스는 여유롭게 달리면서 함성을 들었다. 키스에게는 ..
*마지막 문장에 다음 편 링크가 걸려있습니다. “제자리에 준비~” 곧 터져 나올 총성을 지레 상상하고 키스는 벌써 인상을 찡그렸다. 체육대회라고 몸소 나서 땀을 흘릴 생각은 없었는데. 체육대회가 열린다는 소식에 키스는 전혀 들뜨지 않았다. 하루 치 수업을 듣지 않아도 된다는 점만은 썩 나쁘지 않은 듯했으나,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세워진 ‘반드시 한 가지 이상의 종목에 참가’라는 조건을 요령 좋게 피할 궁리로 머리가 소란스러웠다. 사실 궁리랄 것까지도 없었다. 순수한 실력을 보여서 선수로 발탁되는 사태를 막기 위해 예선 경기를 무성의하게 달리는 것이 키스가 보일 수 있는 최선의 반항이었다. 보는 사람까지 의욕이 떨어지는 걸음걸이로 운동장을 서성인 덕분에 키스의 농땡이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
- Total
- Today
-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