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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한하기에 무한히 아름다운 순간을 우리는 몇 번이고 넘어왔다. 그렇게 사람들은 짧은 순간 빛을 발하는 필름을 이어붙인 장편영화 속에서 살아간다.




 

 

    디노는 할인매장의 비닐봉지를 들고 계단에서 튀어 오르듯이 달려가 캄캄한 옥상 한가운데에 쪼그리고 앉았다. 키스는 맥주캔을 하나 들고 디노의 뒤를 따라 느긋하게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두 사람이 사는 건물 옥상은 텐트를 치고 캠핑을 하기에도, 누군가를 불러 바비큐를 하기에도, 하다못해 화분을 돌보기에도 애매하게 좁아 여가를 즐기기엔 마땅치 않았다. 여름밤에 옥상에서 할 수 있는 유흥이라고 해봐야 냉장고에서 갓 꺼내온 맥주를 홀짝이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런데도 디노는 한껏 흥이 나서 낮에 산 물건이 든 봉지를 뒤적거렸다.

 

    키스는 그런 디노를 흘끗 쳐다보고는 그대로 지나쳐 난간 근처에 섰다. 옥상에는 따로 조명 장치도 없었기 때문에 길거리에 드문드문 놓인 가로등과 주변 건물의 창에서 빠져나오는 미약한 빛에 시야를 의지해야 했다. 그 탓에 조금 거리를 두고 섰을 뿐인데 디노의 얼굴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건물 아래로 시선을 옮겨도 한산한 주택가 골목에는 쓰레기를 내놓으러 나오는 주민들 외에 지나다니는 사람도 얼마 없었다. 

 

    키스가 맥주캔을 힘주어 따자 탄산 빠지는 소리가 시원하게 터져 나왔다. 키스는 기세 좋게 맥주를 몇 모금이고 꿀꺽꿀꺽 들이켰다.

 

    “크으~”

    “키스 아저씨 같아.”

 

    디노는 그렇게 말하곤 장난스레 웃으며, 이제는 아예 콧노래까지 흥얼거리고 있었다. 표정은 어둠에 묻혀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낮에 할인매장에서 산 스파클라에 불을 붙일 생각에 들떠있다는 사실만큼은 장담할 수 있었다. 키스는 이 건물 옥상에서 불을 사용하는 것이 괜찮은가에 대해 뒤늦게 우려했으나, 그것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만에 하나라도 옥상에서 불꽃놀이를 할 수 없을 때, 이 열대야에 디노의 손에 이끌려 먼 곳까지 이동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훨씬 컸기 때문이다. 키스는 건물 규정에 대해서는 입을 다문 채 눈을 흘기며 구시렁댔다.

 

    “너는 애냐.”

    “왜? 불꽃놀이는 나이 상관없이 즐길 수 있는 거잖아.”

 

    스파클라를 계산하기도 전부터 디노는 종일 기분이 고양되어 있었다. 충동구매를 제지하려는 키스와 한 차례 교섭이 있기는 했으나, 열 개 들이 한 세트만 사는 것으로 타협점을 찾을 수 있었다. 그 뒤로는 해가 언제 떨어지나 틈틈이 창밖을 확인해대며 스파클라 포장지를 만지작대다가 해가 저물어 완전히 태양 빛이 사그라들 무렵에는 키스를 재촉했고, 방에서 에어컨 바람을 쐬며 맥주를 마시고 싶어 하던 키스를 설득하고 설득해서야 지금에 이르렀다.



 

    “키스, 라이터 빌려줘!”

    “어휴…….”

 

    디노는 포장지의 접착면을 뜯어낸 다음 막대를 하나 꺼내 들고 일어서, 휴대폰의 손전등으로 키스가 있는 쪽을 비추었다. 키스는 바지 옆주머니에서 라이터를 찾아 디노에게 던졌다. 디노는 키스가 성의 없이 던진 라이터를 가뿐하게 받아내며 고마워, 하고 씩 웃었다.

 

    디노는 바람을 등지고 스파클라를 최대한 몸에서 떨어뜨린 뒤에 불을 붙였다. 눈이 따끔거릴 정도로 밝은 불꽃이 사방팔방으로 튀며 어둡던 옥상이 디노를 중심으로 밝아졌다. 디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큰 목청으로 세상이 떠나가라 호들갑을 떨었다.

 

    “우와, 엄청 밝아!”

    “밤이니까 조용히 좀 해.”

 

    지나가는 사람이 있었더라면 틀림없이 이쪽을 올려다보고 갔을 것이다. 행인이 아니어도 언제 맞은편 건물 창에서 주민들이 바깥을 내다볼지 모르는 일이었다. 키스의 핀잔에 디노는 아차 하는 눈으로 잽싸게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인근 빌딩들의 창은 냉방 중이어서인지, 날아드는 벌레들을 피하기 위해서인지 굳게 닫혀 있었다. 자기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내민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디노는 안심한 듯 얼굴을 펴고 타오르는 불꽃을 흔들며 희희낙락댔다.

 

    아까보다는 한층 억누른 음량으로 디노는 키스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었다. 역시 여름엔 이런 거 한번 해 줘야지. 큰 불꽃놀이도 좋지만 이런 막대 불꽃놀이도 재밌지 않아? 다음에는 바닷가에 놀러 가서 하고 싶어! 지금 생각난 건데 여기서 이런 거 해도 괜찮나? 적당히 추임새만 넣어 답하던 키스는 아마 될걸? 하고 디노의 물음을 애매한 답변으로 회피했다.

 

    실없는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까맣게 타버린 스파클라를 양동이에 담그자 불이 완전히 꺼지는 소리와 동시에 옥상은 눈 깜짝할 새에 어두워졌다.

 

    재미는 있는데 너무 짧아.

 

    왜 즐거운 건 금방 끝나버리는 걸까. 놀이터에서 공을 차다가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자 투정을 부리는 아이와 비슷한 수준의 가벼운 한탄이었다. 키스는 호응하지 않았다. 거기에 멋들어진 대답을 내놓을 정도의 문학적 감성이 자신에게 없다는 건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애초에 디노도 누군가의 답변을 바라고 뱉은 말은 아니었을 터였다.

 

    하긴 그래야 다른 즐거운 일을 할 수 있지!

 

    디노는 거의 노래를 부르듯 흥겨운 톤으로 중얼대며 새 스파클라를 꺼내 다시 불을 붙였다. 타닥타닥 불꽃이 공격적으로 튀어 오르는 소리와 함께 옥상이 재차 밝아졌다. 디노는 키스가 무어라 끼어들 틈도 없이 홀로 결론을 내리고 작은 탄성을 내질렀다.

 

 

    “그러고 보니까 키스랑 같이 있으면 매일 즐겁네.”

 

    디노는 남이 듣기에 부끄러울 소리를 하면서도 태연했다. 틀림없이 키스를 바라보는 두 눈이, 눈부실 정도로 강한 빛을 받아 여느 때보다 환해 보였다. 끝이 있기에 찰나를 만끽할 줄 아는 사람의 투명한 눈이었다. 언젠가 끝나는 순간에 대해 얘기를 하면서도. 그럼에도 키스는, 어쩔 수 없이 일상의 종착점을 상상하고 말았다. 여기서 별 의미도 없는 수다를 떨다가 당연하다는 듯이 함께 방으로 내려가 서로의 옆에서 잠드는 날이 앞으로 얼마나 남았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키스가 잠시 씁쓸한 잡념에 빠지는 동안, 디노는 불꽃이 붙은 막대를 붕붕 흔들며 허공에 낙서를 시작했다. 별 모양을 그렸다가, 키스에게 읽어 보라며 글자를 쓰기도 했다. 허공에 날려 쓴 글씨는 잔상을 남기려다가도 순식간에 지워져 읽을 수는 없었지만, 분명 '키스 바보' 라거나 하는 시시한 문구였을 것이다.

 

    광선으로 남긴 잔상도, 모래사장에 그린 그림도, 즐거운 일을 하는 시간도, 사랑하는 누군가와 보내는 날들도, 언젠가는 스르르 끝이 나고 마는 것이다. 키스는 단발적인 불꽃놀이를 즐기기 위해 몇 번이고 막대에 불을 붙이는 디노의 모습을 눈에 새기려는 듯이 한참을 응시했다.

 

    캔을 따자마자 맥주를 정신없이 들이켰더니 벌써 내용물이 비어 있었다. 옥상에는 한 캔밖에 안 들고 왔는데. 키스는 건조해진 눈을 느리게 끔벅이며 아쉬운 듯 캔을 흔들었다. 키스가 술을 거의 다 마셨다는 사실을 알아챘는지, 디노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키스에게 손짓해 아직 불이 붙지 않은 스파클라를 내밀었다.

 

    빈 캔을 괜히 한 번 더 홀짝이자 이제는 미적지근해진 맥주가 혓바닥 위로 몇 방울 똑똑 떨어졌다. 키스는 대충 구긴 캔을 디노가 들고 온 할인매장 봉투에 집어넣었다.

 

    키스는 사양 않고 불꽃놀이에 참여하기로 했다. 이 양을 디노 혼자 전부 태우고 들어가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 같다는 것과, 디노가 혼자 놀고 싶어 산 것이 아니란 것쯤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이유가 7할 정도였다. 나머지 3할은, 어째서인지 지금 함께하지 않으면 손해라는 내면의 부추김 탓이었다.

 

    디노는 키스에게 스파클라를 건네주고 손수 라이터로 불까지 붙여주었다. 막대가 팝콘 튀기는 소리를 내며 타오르기 시작했다. 가까이서 보니 멀리서 구경만 할 때랑은 비교도 안 되게 탄내가 났다. 검은 연기도 하늘을 덮을 정도로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거 신고 들어오는 거 아냐? 그런 생각은 들었지만, 키스는 나중 일은 미래의 디노에게 맡기기로 하고 그저 막대를 들고 멀뚱히 서 있었다. 디노는 키스에게 불을 붙여준 다음, 자기도 새것을 꺼내 불을 붙였다.

 

    “혼자 할 때보다 훨씬 밝고 예쁘다.”

 

    디노는 대단한 업적이라도 이뤄낸 사람처럼 뿌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불꽃도, 이 순간도, 금방 꺼지고 말 것을 알면서도.

 

    그래, 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둠 속에서 빛을 그리워할 수 있는 것은 금방 져버리는 빛을 본 적 있는 사람만의 특권이었다. 찬란한 추억의 한 조각을 평생 가슴에 품고 살아갈 수 있는 것도, 바람 앞 촛불처럼 금방 꺼져버리는 애틋하고 근사한 시간을 보낸 적 있는 사람만의 특권이었다. 

 

 

 

    “키스, 여기 봐봐.”

 

    디노는 옥상 저편으로 달려가 개운한 웃음을 지으면서 막대를 허공에 붕붕 휘두르기 시작했다. 거의 죽어가는 불꽃이 몇 번이고 하트모양의 잔상을 덧그리고 있었다. 막대 끝이 디노의 얼굴에 가까워질 때마다 그의 미소가 선명하게 보였다가, 빛이 멀어지면 어둠에 덮였다가를 반복했다. 키스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피식 웃으며 자기가 든 불꽃으로 가위표를 쳤다.

 

    “왜!?”

 

    예상보다 격한 디노의 반응에 키스는 파핫, 웃음을 터뜨렸다. 디노는 살짝 떨어진 거리에서도, 불꽃 타는 소리에 묻혀가는 키스의 작은 웃음소리를 놓치지 않았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스파클라의 불꽃은 방금까지의 격렬함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사그라들고, 옥상은 마치 무대의 막이 내려간 듯이 순식간에 캄캄해졌다.

 

    “디노.”

    “응?”

 

    이번에는 키스가 장난기 섞인 목소리로 디노를 불렀다. 방금까지 밝은 빛을 보고 있었으므로 어둠에 익숙해진 줄 알았던 눈이 또 제 기능을 못 하고 있었다. 디노의 아득한 윤곽을 흐린 눈으로 더듬으며 키스는 디노의 대답이 들리는 곳으로 몇 발자국 걸음을 옮겼다. 짧은 부름에 키스의 의도를 파악한 디노도 마찬가지로 맞은편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서로의 얼굴을 간신히 확인할 수 있는 거리에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사람은 스파클라의 불꽃이 타는 시간보다 짧고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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