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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노키스] Miraculous Moments

알잉뽀 2021. 12. 11. 23:24

 

 

 

#디노키스_스터디

12월 주제: [크리스마스]

 

 

 

Jilllian Edwards - All My Christmases 

https://youtu.be/5chG9QSyjcw

 

 

 



   함께하기에 경험할 수 있는 기적 같은 순간은, 때로는 비현실보다 훨씬 비현실적이다.

 

 


   웨스트 섹터의 떠들썩한 크리스마스도 저물어가고 있었다. 히어로들에게 있어서 휴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일정을 마무리 지은 이후에 귀한 시간을 쪼개 모여서 저마다 취향껏 고른 토핑을 얹어 피자를 만드는 정도는 함께할 수 있었다. 타워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얼마 남지 않은 12월 25일에 대한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오늘의 피자파티는 크리스마스를 테마로 한 영화와 함께 개최되었다.

 

   제목에 크리스마스가 들어간다는 이유로 선정한 영화는, 등장인물들이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다수 포함된 로맨스 뮤지컬이었다. 타이틀에 충실하게 삽입곡은 캐럴이 주를 이뤘다. 디노는 영화를 보는 내내 크리스마스 분위기에 동화되어 아는 곡이 나오면 배우들과 동시에 흥얼거리기까지 했다. 그렇게 시종 반짝이는 눈으로 집중하던 디노는, 영화가 상당히 마음에 찼는지 엔딩 롤이 올라가자마자 다른 멤버들의 감상을 물었다.

 

   개연성이 부족하고 진부한 스토리지만 경쾌한 캐럴 멜로디와 맞물려 줄거리가 밝고 포근했으므로 가볍게 보기 좋았다고 페이스는 평가했다. 초반에 지루한 기색을 보이던 주니어는 마지막 장면에서 마음이 동했는지 가끔은 이런 영화도 나쁘지 않다고 말했다. 키스는 중간에 잠시 졸아서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모이는 시간이 늦었던 만큼 영화를 곁들인 단란한 모임은 영화가 끝남과 동시에 막을 내렸다.

 

   파티는 짧았으나 크리스마스의 끝자락을 아쉬워할 새도 없이, 디노는 방에 돌아와서도 여운에 젖어 노래를 흥얼거렸다. 침대에 걸터앉아 책장 너머 디노의 방을 흘끔거리며 키스는 생각했다. 쟤는 크리스마스 끝나면 서운해서 어떻게 사냐.
 

   내일은 저거 다 치울 거지?

 

   키스는 일어서지 않아도 보일 정도로 벽에 주렁주렁 걸린 꼬마전구에 눈길을 주며 물었다. 디노는 부르던 노래를 타이밍 좋게 끊으려다 대답이 한 박자 늦어졌다.

 

   …아직 크리스마스도 다 안 갔는데 그런 서운한 소리를 하다니.
 

   볼멘소리로 대답했지만, 디노가 내일부터 새해맞이로 들뜰 거라는 사실은 키스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From now on

앞으로는
All my Christmases with you

내 모든 크리스마스를 너와 함께

 

 

   디노의 방은 크리스마스 느낌이 물씬 나는 색으로 한껏 물들어 있었다. 가뜩이나 별난 잡화를 늘어놓은 채로 정리하지 않아서 요란하던 방이 미니 트리와 크리스마스 장식들로 한층 더 혼란해져 있었다. 그 안에서 뮤지컬 배우처럼 팔을 허공에 휘적거리며 캐럴을 부르는 디노는 어설프게 영화 주역을 흉내 내는 초등학생 같았다.

 

   나까지 외우겠네.
 
   반복되는 코러스의 멜로디가 슬슬 귀에 앉을 무렵 키스가 비꼬듯 불평을 늘어놓았다. 디노는 키스의 쌀쌀맞은 반응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어깨를 들썩이면서 키스의 방까지 가벼운 발걸음으로 통통 걸어왔다. 그러더니 키스가 걸터앉은 침대로 다가와 대뜸 양손으로 키스의 오른손을 감싸 쥔 다음, 연극을 하듯 말했다.

   자기야, 같이 노래하자.
   어우, 너 진짜 배우는 못 되겠다.
 
   달콤한 대사의 출처는 오늘 본 뮤지컬 영화였다. 발렌타인에 카메라를 향해 '좋아해' 한마디를 못해서 애를 먹던 녀석이 맞나. 진심이 담기기만 하면 부끄러운 소리도 아무렇지 않게 하는 녀석이었다. 물론 이것이 배우의 흉내라는 점을 상기시키자면 세간에서 형편없다는 평가를 받을 연기임은 틀림없었다. 배우의 명품 연기가 섞인 '자기야'는 보는 쪽이 속 쓰릴 정도로 다디달았는데, 디노의 연기로 각색하고 보니 편한 친구 사이의 까불거리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키스는 잠결 사이사이로 보았던 장면을 떠올렸다. 주인공이 연인의 손을 잡고 이 대사를 하는 장면에서 눈이 내리기 시작했던 것 같은데. 아쉽게도 올해 크리스마스는 눈이 내리지 않았다. 이미 아홉 시가 훌쩍 넘은 데다가, 심야에도 눈이 내린다는 얘기는 들은 바가 없었으니 화이트 크리스마스는 완전히 물 건너 간 듯했다. 

 

   키스의 박한 평가에 잠시 몰입이 깨졌는지 가볍게 인상을 찡그리던 디노는 잡았던 손은 놓고, 키스에게 팔짱을 끼더니 옆에 와 앉았다. 눈이 내리든 말든, 디노는 다시 목을 가다듬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There will be days that we'll be cold

추운 날도 있을 거야
There will be times when we won't know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때도 있을 거고
What life will throw, but

인생이 어떻게 될지, 하지만
I'll be beside you
내가 옆에 있을게



   그러더니 디노는 키스의 팔짱을 낀 채로 일어서려고 몸짓했다. 따라서 일어나 달라는 의미인 듯했다. 디노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뮤지컬 주역의 마음가짐으로 누구보다 진지하게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키스는 짐짓 귀찮은 내색을 보이면서도 곧이곧대로 일어서 디노가 이끄는 대로 움직여 주었다. 디노는 멀리 가지 않고, 바로 맞은편에 있는 자기 방으로 키스를 데려오면서 불을 껐다. 전등을 대신해 벽에 걸린 꼬마전구들과 미니 트리의 장식들이 아늑한 빛으로 어두운 방을 밝혀주었다. 

 

   계절감이 가득한 배경에서 노래하는 디노는 여태까지 수도 없이 봐 왔다. 하지만, 원한다고 해서 매년 볼 수 있는 모습은 아닐 것이다. 옆에 있어 주겠다는 가사를 부른다고 해서 그것이 앞으로의 운명을 약속하는 것이 될 수는 없었다.

 

   맞닿은 디노의 팔이 따뜻했다. 키스는 이제 체념했는지 잠자코 노래를 들어 주었다. 디노는 고개를 돌려 키스를 보고 웃어주다가, 돌연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는 듯이 의자에 대충 걸쳐진 포근한 담요를 들고 키스에게 다가와, 담요를 펴 키스의 머리 위에 얹어주었다.


   디노가 너무나도 천천히 다가오기에 되려 피해야겠다는 의식조차 못 했던 키스는 얼굴을 덮은 담요를 손등으로 걷어내며 물었다.

 

   뭐야?
   베일 씌워준 거야.

   내가 신부냐….

   키스는 신랑이지! 나도 그렇지만.

 

   키스의 맥 없는 지적에는 태연한 대답이 돌아왔다. 누가 베일을 쓰느냐는 별 대수로운 문제가 아니었다. 디노는 어디까지 불렀는지를 잊었는지 잠시 버퍼링이 걸린 듯 멈칫했다가, 자기가 좋아하는 소절부터 이어 부르기 시작했다.

 

 


Every day is Christmas

매일이 크리스마스야
Every day I'm living by your side

난 늘 네 곁에서 살아가

 

 

 

   키스는 졸다가 깼을 즈음 눈에 들어온 장면을 떠올렸다. 서로 사랑하지만 당장 결혼식을 올릴 수 없었던 메인 커플은, 후줄근한 정장을 주워입고, 어설프게 레이스 커튼을 뒤집어쓴 채로 눈 내리는 도시에서 이 노래를 부르다가 입을 맞춘다. 밤거리를 바쁘게 지나다니던 사람들이 그 주변으로 하나둘 모여 걸음을 멈추고, 주역들이 입술을 떼자마자 박수를 보내며 환호해 준다. 빛이 들어오지 않아 잠잠했던 거리에 일루미네이션이 켜지고, 둘만의 조촐한 결혼식은 순식간에 축제 같은 분위기로 변한다. 마지막에는 주인공이 거리의 모두와 경쾌한 엔딩 곡을 부르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영화 속 커플은 앞으로 매년 크리스마스를 서로의 곁에서 보낼 것이다. 후속작이 나온다고 해도 절대 비극적인 끝을 맺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세계관에서 쓰인 뮤지컬이었으니까. 키스는 그것이 흔해 빠졌어도 썩 나쁘지 않은 엔딩인 것 같았다. 인생사가 다 그렇게 쉽게 풀리면 얼마나 좋아. 영원이란 노래를 부르며 약속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디노와 함께라면 적어도 노래를 부르면서 결말을 향해 걸어가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짧은 노래는 금방 끝이 났다. 방은 잠잠해졌어도 따뜻한 조명을 받은 디노의 얼굴은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해 보였다. 디노처럼 웃고 있지는 않겠지만, 키스는 자기도 충분히 남에게 보이기 민망할 표정을 짓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산타가 없다는 사실을 또래보다 일찍 깨달을 수밖에 없었던 어린 시절에는 크리스마스가 그저 남 일 같고 소란스럽기만 했는데, 디노는 매년 크리스마스를 자기 체온으로 가득 채워주었다. 오늘도 이렇게 여전히.

 

   자기야, 키스해도 돼?

 

   디노는 또 소름 돋는 대사를 아무렇지도 않게 읊었다. 이 대사 직후에 배우들이 입을 맞췄나? 키스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디노는 수줍은 미소를 보이며 키스의 머리에 얹힌 담요를 거두고 입을 맞췄다. 디노가 키스의 입술을 가볍게 혀끝으로 핥짝대자, 키스는 그에 대답하듯 디노의 아랫입술을 가볍게 빨아들였다. 신호를 알아들은 디노가 키스를 침대에 눕히더니 장난스러운 숨소리를 흘렸다. 키스는 디노를 살짝 뒤로 밀어내는 시늉을 하며 가볍게 웃었다.

 

   잠시 입술을 떼고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재차 입술을 겹쳤다. 이번에는 깊고 길게. 그대로 눈을 감고 서로의 온기에 집중하면, 상대의 입술이 젤리처럼 달콤하고 부드럽게 느껴진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것처럼 혀가 성급히 얽히고, 고요한 방에서 어느 것이 누구의 숨소리인지 모를 정도로 호흡이 뒤섞였다. 그렇게 몇 차례 달콤한 신음이 오가고, 숨이 찰 즈음에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그 순간,

 

 

 

   타워 밖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은밀한 시간을 나누고 있지 않았더라면 이렇게까지 놀라지도 않았을 것이다. 둘은 범죄 모의라도 하다가 들킨 사람처럼 동시에 어깨를 움츠렸다. 눈이라도 내리나? 아무리 크리스마스라고는 해도 눈이 내리는 정도로 이렇게 바깥이 소란스러울 리는 없었다. 다른 행사가 있나? 이런 날이다 보니 이벤트가 열리고 있을 가능성은 충분했다. 예기치 못하게 깨진 무드에 멋쩍어진 두 사람은 말 없이 동작을 멈추고 있다가 결국에는 거실 창문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내다보기 위해 방을 나섰다.

 

 

 

   거실의 넓은 창밖으로 본 밤하늘에는, 일루미네이션처럼 선명하고 부드러운 빛이 점멸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한동안 그 풍경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타워가 상당히 고층이라 이곳에 선명히 보이는 일루미네이션을 설치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동시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일루미네이션이 아니라, 분명 눈이 오고 있었다. 가로등 대신 거리를 밝힐 수 있을 정도로 따뜻한 빛을 품은 눈송이가, 형형색색으로 빛나는 눈송이가 겨울바람을 타고 춤추듯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별가루가 쏟아지는 것만 같았다. 바깥에 있던 사람들은 나이도 잊고 산타에게 선물을 받은 아이들처럼 들썽거리며 하늘에 손을 뻗었다. 

 

   디노는 영화가 끝났을 때보다 더 벅찬 목소리로 외쳤다. 
 
   페이스, 주니어~! 나와 봐! 밖에 엄청 반짝거리는 눈이 내리고 있어!
 
   아직도 뮤지컬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데다가 처음 보는 풍경에 흥분한 디노는 거의 소리치듯 루키들을 불러내고, 다시 창으로 눈을 돌려 하염없이 바깥을 바라보았다. 낯설고도 찬란한 풍경에 키스 역시 어떤 감탄사를 뱉어야 할지 알 수 없어졌다. 무슨 일이든 일어나는 도시이니 믿기지 않을 것까진 없었지만, 정말 하루하루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르는 법이다. 키스는 막연히 그런 감상을 안고 하늘에서 쏟아지는 다채로운 눈송이를 넋 놓고 바라보았다.

 

 

 

   디노는 한참 동안 말이 없다가, 예고도 없이 키스의 손을 덥석 잡았다.

 

 


   키스, 우리 밖에 나가서 노래 부를까?
   뭐?

 


 
   또 영화 흉내야? 키스는 불안한 눈으로 디노를 쳐다보며 내심 그것이 농담이기를 바랐지만, 디노는 제대로 된 대답을 듣기도 전에 키스를 붙잡은 채로 겉옷을 가지러 방으로 달려가려고 몸을 기울였다. 키스는 디노를 멈춰 세웠다.
 
   너, 이게 뮤지컬인 줄 알아.
   뮤지컬보다 더 뮤지컬 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잖아?
 
   디노는 아까보다는 차분해진 목소리로 웃었다.

 


 
   우리도 결혼식 올리자, 지금.

 

 

 
   방에서 장난스럽게 노래를 부르던 당찬 모습은 어딜 갔는지, 웃으면서 그런 얘기를 하는 디노의 얼굴은 이마까지 새빨개져 있었다. 말문이 턱 막힌 키스는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숨을 삼켰다. 아까까진 잘도 부끄러운 소릴 하더니, 영화 속 눈 내리는 뉴욕 거리에서 노래를 부르던 커플 흉내를 내잔 소리를 하면서 이렇게까지 쑥스러워할 일인가. 대답을 모색하는 사이에 키스는 디노의 뜨거워진 손이 살짝 떨리는 것을 느꼈다. 그러다 문득,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는 이런 대사가 없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그것은 뮤지컬 흉내가 아니라 온전히 디노의 본심이었다. 키스는 그제야 덩달아 얼굴이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키스가 말을 잇지 못하자 디노는 정적을 견딜 수 없었는지 팔에 힘을 줘 키스를 꽉 안아주었다. 그러다가, 팔을 금방 풀어주고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눈을 마주쳤다. 서로를 마주 보는 두 사람의 눈에는 오로지 상대방의 얼굴과 조명처럼 다채로운 빛깔의 눈송이만이 들어차 있었다.

 

   잠시 뜸을 들이다가 이번에는 키스가, 디노를 끌어안았다. 키스가 보여줄 수 있는 대답은 그게 전부였다.

 

   아무도 노래를 틀지 않았는데 영화 주인공들이 마지막 장면에서 많은 사람들과 불렀던 엔딩 곡의 전주가 귓가에 맴도는 것 같았다. 눈부신 풍경에 시선을 빼앗겨 들뜬 뉴밀리온 주민들이 같이 노래를 불러줄 것 같지는 않았지만, 키스는 디노와 함께 밖으로 나가기로 했다. 혹시 모르는 일이었다.

 

   함께하기에 경험할 수 있는 기적 같은 순간은, 때로는 비현실보다 훨씬 비현실적이다. 개연성이 없고 흔한 엔딩이어도 좋았다. 오늘은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는,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크리스마스 밤이니까.
 

 

 

 

 

Presents, what a beautiful sight

선물도 근사한 풍경도

Don't mean a thing if you ain't holding me tight

네가 날 안아주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어

You're all that I need underneath the tree

트리 아래에는 너만 있으면 돼

 

 

 

 

 

 


Kelly Clarkson - Underneath the Tree
https://youtu.be/EM2Fnp_qnE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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