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막한 인생에 홀연히 나타난 인생의 반려자. 그런 형편 좋은 이야기가 존재할 리가 없었다. “키스랑 앞으로도 계속 같이 있고 싶어.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우리…” 키스는 잠결에 들려오는 익숙한 환청에 눈을 떴다. 꿈의 끝자락을 붙잡던 디노의 떨리는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히 귀를 간질였다. 천천히 눈꺼풀을 열어도 젖히지 않은 암막 커튼으로는 빛이 한 줄기도 새어 들어오지 않아 캄캄한 방에서 시간을 가늠할 도리가 없었다. 꿈에서 깬 순간 이미 잠은 달아났지만, 키스는 몸을 일으키지 않고 도로 눈을 감았다. 어차피 오지도 않을 잠을 다시 청할 생각은 없었다. 키스는 그저 홀로 뇌리에 생생하게 박힌 디노의 목소리를 곱씹었다. ‘전에도 꾼 적 있는 꿈’ 수준이 아니라, 최근 같은 꿈을 꾸는 빈도가 상당..
*중간에 클릭해야 열리는 접음글이 여럿 포함되어 있습니다. '펼치기' 혹은 '더보기'를 누르면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 안녕, 미래의 나. 트라이아웃 합격자들은, 아카데미 졸업을 앞두고 미래의 자신에게 보낼 문장을 다듬고 있었다. 히어로가 되었을 나에게 편지 쓰기. 거창한 행사는 아니었다. 곧 순직 가능성이 있는 직업에 종사할 미래의 히어로들이 장래를 그려보며 각오를 다지고 다시금 자신의 목숨을 소중히 여기자는 취지였으나, 따로 제출하거나 점수를 매기지는 않았다. 따라서 이 행사에 진지하게 임하느냐 멍한 얼굴로 시간만 때우느냐는 개개인의 마음가짐에 달린 문제였다. 신중한 얼굴로 술술 글씨를 써 내려가는 이도 있었고, 펜을 쥐고 백지를 노려보며 한참을 망설이는 이도 있었다. 누군가에게 보여주는 것이 아니..
키스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디노의 손목을 잡고 디노를 운동장으로 끌어냈다. 좀처럼 자신이 가져와야 할 물건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아이들 사이에서, 용감하게 객석으로 뛰어든 키스에게 보내는 환호가 터져 나왔다. 디노는 키스가 손을 뻗는 순간까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다가, 조만간 이해했다는 듯이 벌떡 일어서 키스와 함께 트랙을 달리기 시작했다. 키스는 별다른 설명은 덧붙이지 않았다. 어떤 주제를 뽑았는지조차 알려줄 마음이 없었다. 골인 테이프를 향해 직진하는 키스의 옆얼굴을 들여다 보며, 디노가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주제로 ‘제일 친한 친구’라도 나온 거야!?” 기대에 찬 목소리였으나, 정답은 아닌 듯했다. 키스는 숨을 몰아쉬며 간신히 대답했다. “아니거든. 네가 나 혼자 뛰게 만든 게 괘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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