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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노키스] 내일의 우리에게

알잉뽀 2022. 2. 19. 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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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미래의 나.

 

 


트라이아웃 합격자들은, 아카데미 졸업을 앞두고 미래의 자신에게 보낼 문장을 다듬고 있었다.

 

히어로가 되었을 나에게 편지 쓰기. 거창한 행사는 아니었다. 곧 순직 가능성이 있는 직업에 종사할 미래의 히어로들이 장래를 그려보며 각오를 다지고 다시금 자신의 목숨을 소중히 여기자는 취지였으나, 따로 제출하거나 점수를 매기지는 않았다. 따라서 이 행사에 진지하게 임하느냐 멍한 얼굴로 시간만 때우느냐는 개개인의 마음가짐에 달린 문제였다.

 

신중한 얼굴로 술술 글씨를 써 내려가는 이도 있었고, 펜을 쥐고 백지를 노려보며 한참을 망설이는 이도 있었다. 누군가에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고 해도 미래의 내가 이 편지를 기억하고 공책을 펼쳐본다면. 혹은 내가 순직한 후에 동료가 이 공책을 발견한다면. 결국 이것도 누군가를 위해 남기는 글이 되는 셈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무거운 마음에 좀처럼 펜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키스도 처음에는 공책에 적을 내용을 한참 고민했다. 그러나 편지를 쓰는 행위 자체가 손에 익지 않아 어떤 말로 시작해야 할지 감을 잡을 수 없었고, 무엇보다 자신에게 글을 쓴다는 점이 낯간지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작문에 도무지 몰입할 수 없었던 키스는 오랫동안 고민하다가 달랑 세 줄을 남겼다.

 



미래의 키스 맥스에게.
나야 뭐

적당히 잘 먹고 잘살고 있겠지

 



더는 쓸 말이 떠오르지 않아서 키스는 잠시 공책을 덮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주변에서 들리는 펜 사각거리는 소리와 교사의 시선에 어깨가 움츠러든 키스는 다시 느릿느릿 공책을 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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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 키스!

이거 그건가?

졸업 앞두고 썼던 미래의 나에게 보내는 편지

근데 왜 이렇게 짧아!

난 되게 길게 썼던 것 같은데

키스는 예나 지금이나

손으로 글씨 쓰는 걸 귀찮아한다니까

 



키스는 깜짝 놀라 하마터면 그대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설 뻔한 것을 가까스로 참고 자기 허벅지를 꼬집었다. 방금 쓴 글 아래에 다른 누군가가 손으로 써준 코멘트가 남아 있었다. 키스는 식은땀이 맺힌 손으로 공책을 덮었다. 펜을 놓고 딴청을 부리던 시간은 기껏해야 3분 남짓이었다. 그 사이에 펜과 공책이 어디 갔던 것도 아니었다. 키스의 눈을 피해 몰래 글을 쓰는 건 이 자리에 있는 누구라도 불가능했다. 키스는 심호흡하듯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누군가가 남긴 글 밑에 새로 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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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야?
뭐야?

 

 


글을 남긴 후에 여백을 노려보고 있어도 답장이 바로 쓰이지는 않았다. 그러고 보니 아까는 공책을 덮고 딴짓을 하는 사이에 새로 글이 쓰였지. 키스는 공책을 덮고 잠시 기다리기로 했다. 또 3분 정도가 흘렀을까. 이정도 기다렸으면 답이 왔겠다 싶어 공책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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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키스가 답장 써준 거야??

어떻게?

이것도 원래 쓰여있던 건가?

이거 그냥 공책이 아닌가?

 

 

 

답장을 받고 놀란 것은 키스뿐이 아닌 듯했다. 수많은 물음표를 보아하니 처음 키스에게 건넸던 말도 답장을 기대하고 쓴 것이 아닐 터였다. 기이한 현상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전지전능한 누군가가 미래에서 자신을 꿰뚫어 보고 쓴 게 아니었음을 확인한 키스는 허리에 기운이 쭉 빠지는 것 같았다. 심지어 자세히 들여다보니 어디서 많이 본 듯 눈에 익은 글씨체였다. 그래도 키스는 확인 삼아 다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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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냥 내 공책 맞는데

너 디노냐?

 

 

 

키스는 아까처럼 공책을 한 번 덮고 상대가 답을 쓸 시간을 주었다가 펼쳐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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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건 왠지 말하면 안 될 것 같아

이걸 쓸 즈음이면 키스는 지금 아카데미 졸업을 앞둔 때 같은데

미래 사람이 과거에 간섭하면 큰일 난다는 얘기도 있잖아 ^ ^ 

그건 그렇고 진짜 신기하다!!

졸업 미리 축하해!!

늘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키스도...
새로운 시작을 앞두고 불안한 마음이 컸겠다

 

 

 

‘키스도…’에서 펜이 오래 머물렀는지 잉크가 번져 있었다. 편지를 쓴 본인에게 건네는 말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키스는 한동안 그 글자의 나열을 응시하다가, 옆자리에서 진지하게 편지를 쓰고 있는 디노의 얼굴을 흘낏 보고는 그 밑에 이어서 답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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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어차피 늘 보던 녀석들이랑 같이 가는 건데

있는 곳 좀 바뀐다고 해도 크게 변하는 건 없을걸

넌 불안했다는 뜻이야?

 

 


공책을 덮었다. 직전에 받았던 답장에 정곡을 찔렸음에도 키스는 습관적으로 태연한 척을 했다. 직업에 적응하고 못하고는 둘째치고, 목숨을 거는 일이니만큼 가슴에 품은 불안함이 있는 것은 당연했다. 지금은 인연이 질겨 언제까지고 곁에 있을 것 같은 친구들과 마지막까지 함께일 거라는 보장도 없었다. 디노가 말한 불안은 키스와 같은 종류의 불안이었을까. 아니면 디노가 홀로 안고 있는 또 다른 불안이 있는 걸까. 이번에는 답장이 오기까지 좀 더 오래 걸렸다. 키스가 답을 기다리며 세 차례 정도 공책을 접었다가 펼쳤을 때 옆 페이지에 긴 편지가 도착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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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누군지 알아챈 것 같네!?

너무 많은 얘기를 들려주는 건 안 되겠지?

아쉽지만 지금은 말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어...

 

음~~~~~

설렘도 컸지

너희랑 계속 같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도 기뻤어

하지만 예전이랑 달라진다는 건 언제나 두근거리고 동시에 긴장되는 법이니까

키스도 그럴까 해서...

나도 지금 뭔가... 새로운 시작을 앞두고 있기도 하고

 

하지만 키스 말이 맞아. 모든 게 변하는 건 아니지

변하는 것도 있고, 변하지 않는 것도 있어

그리고 변하지 않는 것들이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게 만들어줄 거야

 

나한테는 그 변하지 않는 무언가가 키스인 것 같아

늘 키스로 있어 줘서 고마워
더 많은 말을 쓸 수는 없겠다...
앞으로도 힘내!!

키스는 항상 멋진 히어로니까 계속 그대로 있어 주면 돼

 

 

 

은근하게 말을 돌리는 모양새에서 그가 굉장히 말을 아끼고 있다는 사실이 글 너머로 절절히 전해졌다. 미래의 간섭이 어쩌고 하는 변명도 거짓은 아니었겠지만, 그런 것을 제외하고도 하고 싶지만 하지 못 하는 말이 많은 것 같았다. 

 

아직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더는 그에게서 들을 수 있는 말이 없음을 깨닫고 키스는 아무 답을 적지 않고 공책을 덮었다. 다시 펼쳤을 때는, 맨 처음 적었던 자신의 성의 없는 세 줄짜리 편지를 제외하고는 모든 흔적이 사라진 상태였다.

 

다만, 마지막에 받았던 편지의 내용은 앞으로도 아주 오랫동안 가슴에 남아 망설임이 있을 때마다 등을 떠밀어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몸은 좀 어때?

키스!

 

 

침대 테이블 위로 펜을 움직이던 디노는 병문안을 와준 키스의 얼굴을 보자 뛸 듯이 기뻐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키스는 상태가 괜찮은 건 전해졌으니 제발 안정을 취해달라’며 침대 아래에서 낮은 의자를 끌어서 꺼내 침대 옆에 앉았다.

 

 

“키스가 만화책이랑 게임기랑 이것저것 가져다줘서 심심하지도 않았어.”

 


디노는 방금까지 글을 쓰던 공책과 펜을 숨기듯 이불 아래로 집어 넣었다.

 

 

“자리만 차지하다가 드디어 주인 찾아 갔구만.”

“만화책 사이에 내 거 아닌 공책도 섞여 있긴 했지만…… 뭐 됐어!”

 

 

디노는 침대 위로 펼쳐 두었던 테이블을 정리하고 침대에 얌전히 앉았다. 그러나 좀처럼 다리를 가만히 둘 수가 없었다. 4년의 공백 끝에 히어로직 복귀를 앞두고 마음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아서일까, 방금까지 과거의 키스와 필담을 나눈 흥분이 가시질 않아서일까. 디노는 발만 동동 구르며 뜸을 들이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많은 게 변하겠지?”

 

 

짧은 순간 키스를 스쳐간 디노의 감정이 복잡하고 깊었다. 키스는 그 목소리에 담긴 일말의 불안을 읽었다. 키스는 생각을 다듬듯이 뒷머리를 긁적이다가, 늘 자신의 망설임을 털어내주던 말을 그대로 디노에게 전했다.

 

 

변하는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겠지.”

 


키스의 대답에 허를 찔린 디노는 놀란 얼굴로 키스와 시선을 마주쳤다.

 

 

“변하지 않는 게 있어 주면 변화가 두렵지 않다고… 누가 그런 소릴 해서 내가 아직도 이 꼬라진가.

“…….”

“넌 그냥 있어야 할 자리에 돌아온 거잖아.”

 

 

조금 전 과거의 키스에게 전해줬던 말이 그대로 되돌아올 줄이야. 키스에게 써 주었던 모든 말들이 결국 미래의 자신에게 보내는 편지가 된 셈이었다. 입을 다물고 가만히 키스의 말을 듣던 디노는 홀가분한 얼굴로 웃으며 침대에 풀썩 드러누웠다.

 

 

“…다 기억하고 있었구나.”

“…뭘?”

 

 

멋쩍어진 분위기에 키스는 시치미를 떼며 슬쩍 시선을 피했다.

 

 

“나 옆 방으로 이사 가는 날 늦잠 자지 마! 자고 있으면 흔들어 깨울 거야.

 

 

한층 가벼워진 디노의 목소리에 키스는 벌써부터 질린다는 듯이 귀를 막는 시늉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틀림없이 교차한 과거와 미래의 메시지는, 여전히 서로의 앞을 밝혀주고 있었다. 과거로 보냈던 메시지를 잊지 않고 변함 없이 자신을 믿어준 사람이 바로 곁에 있었는데 나는 도대체 뭘 두려워했던 걸까. 왠지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디노는 드러누운 채로 베개에 잠시 얼굴을 묻었다. 

 

 

 

 

 

안녕, 과거의 너.

어서 와, 미래의 나.

 





#디노키스_스터디
2월 주제: [새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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