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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를 부르면

알잉뽀 2022. 5. 18. 14:25




   졸업을 앞둔 교실은 합창대회 얘기로 떠들썩했었다.

   말이 대회지 어느 반이 우수한지를 가리는 자리가 아니라 졸업 전 추억 만들기에 가까웠다. 반드시 참가할 필요는 없지만, 많은 교사가 참가를 독려하는 큰 행사였다. 특히나 담임이 음악 선생님인 우리 반은 유독 열의를 보이는 학생이 많았다. 

   동급생들의 들뜬 목소리를 들으면 나만 정처 없이 떠돌고 있는 것 같아 조급해졌다. 



   그러고 보니 음악실에서 얼굴을 못 봤네. 많이 바빠?

   방과 후 합창 대회 연습이 진행된 지 일주일 정도 지났을 즈음 디노 선생님이 말을 걸었다. 돌려 말하고는 있지만 내심 대회에 참가하길 바란다는 듯한 눈치였다. 나는 바쁜 건 아닌데로 운을 떼고 머쓱하게 웃었다. 

   막상 합격해놓고 보니 문득 이 길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디노 선생님은 사뭇 진지한 얼굴로 내 얘기를 들어주고 있었다. 어차피 깊이 얘기할 생각은 없는데. 나는 서둘러 대화를 마무리지을 멘트를 찾았다.

   앞으로 뭘 할지 이제부터 천천히 찾아보려고요.

   휩쓸리듯 보낸 3년 끝에 내 손 안에는 무엇이 남았는가. 남들만큼 치열하지 못했던 어중이떠중이의 삶이란 결국 이런 것이다. 이 정도면 합창대회에 참가하지 않겠다는 의사는 전해졌으리라. 나는 자리를 뜨기 위해 가볍게 목례를 했다.

   그럼 연습하는 거 한 번만 보고 가지 않을래?

   선생님은 내가 명확히 거절하지 않자 끝나가던 대화를 자연스레 이어갔다. 마치 끊어진 실을 모아 팔찌를 엮듯이.



   결국 나는 마땅한 핑계를 찾지 못한 채 디노 선생님과 함께 음악실로 향했다. 음악실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내가 나타나자 친구들이 장난스레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선생님이 피아노에 앉아 가볍게 손을 풀고 반주를 시작하자 아까까지의 요란스러운 분위기는 어디로 갔는지 다들 사뭇 진지한 얼굴로 악보를 주시했다. 교실에서는 잡음처럼 섞이던 목소리가 음악실에서는 한데 어우러져 화음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적어도 이 자리에서는 노래를 잘하고 못하고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서로가 서로의 등을 떠밀어주는 것 같았다.

 

   디노 선생님은, 노래는 언제나 사랑을 타고 세상 밖으로 나온다고 했다. 서정적인 가사일지라도 선율에 이야기를 실어 보내는 것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노래를 부를 수 있으므로. 

   사랑은 쌓인다. 기억에 신체에 가슴에. 한 번 받은 사랑은 결코 지워지지 않으며 나를 구성하는 요소가 되어 영원히 나를 지탱해준다.

   선생님은 그런 추억을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어른이 되어도 이 계절이 돌아올 때마다 노래를 흥얼거릴 수 있도록. 함께 불렀던 노래를 떠올릴 때마다 이 순간을 함께 해준 모든 이들의 사랑이 순풍이 되어 등을 떠밀어 줄 수 있도록.

 


   어때? 디노 선생님의 물음에 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늦었지만

   디노 선생님은 벌써 다음 말을 알아챘다는 듯이 활짝 웃었다.

   저도 같이 연습해도 될까요?

   당연하지!

   디노 선생님은 아이처럼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학생들에게 음악을 가르치는 자리에 선 지금도, 나는 그때 불렀던 노래를 종종 흥얼거리며 디노 선생님을 떠올린다. 나를 기꺼이 맞아주던 선생님의 따뜻한 목소리를 기억한다. 일주일이나 연습에 늦은 나를 배려해주던 친구들의 상냥함을 기억한다. 

   그 시절의 노래는 나를 지지하는 든든한 사랑이 되어 음악실을 맴돈다. 나와 함께 부르는 노래가 누군가에게는 언젠가 싹 틀 사랑이 되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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