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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면서 들은 곡 https://www.youtube.com/watch?v=ArQvRDWulns







스물네 살의 키스는 때때로 잃어버린 기억의 흔적을 좇던 열여덟 살 디노의 옆얼굴을 떠올리곤 한다.



*




샤워를 마친 키스는 침대에 걸터앉아 수건으로 머리에 남은 물기를 성의 없이 털어냈다. 침대 시트에 부슬비 같은 물방울이 후두둑 떨어지고, 열어둔 창문으로 들어온 서늘한 밤바람은 목덜미를 훑었다.

이번 여름방학 내내 디노는 방을 비워야 한다고 했다. 가족이 있는 브래드와 디노가 연휴를 틈타 본가에 돌아가는 것은 매년 있는 일이었지만, 일주일 이상 기숙사를 비우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방학의 시작과 동시에 브래드는 기숙사를 떠났고, 그로부터 나흘이 지나는 내일은 디노가 기숙사를 나간다. 브래드는 금방 돌아올 예정이라고 했으나 디노는 방학이 끝날 무렵에야 돌아오기 때문에 결국 아카데미의 마지막 여름을 셋이 함께 보낼 수는 없게 된 셈이다. 아쉬움을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은 모처럼 근사한 추억을 만들 기대에 한껏 부풀어 있던 디노였다.

디노는 이례적으로 긴 부재의 이유를 명확히는 밝히지 않았다. 다만 그 소식을 전하는 디노의 표정은 여느 여름과는 달리 조부모님을 만나기 직전의 들뜬 얼굴이 아니었기 때문에 키스는 기숙사를 떠나는 것이 디노 본인의 의지가 아님을 어렴풋이 추측할 뿐이었다.

브래드가 기숙사를 나가던 이른 아침, 디노와 키스는 그를 기숙사 앞까지 배웅했다. 브래드는 집에서 데리러 오는 사람이 있으니 그럴 필요는 없다고 사양했지만. 아직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키스는 그때의 기억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브래드를 보내기 전날에 셋이 모여 늦은 시간까지 게임을 하고 수다를 떨다가 한방에서 잠이 들었고, 결국 아침잠이 덜 깬 몽롱한 정신으로 인사를 건넸던 탓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문득, 디노가 내일 몇 시에 나가는지를 물어보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방학이라고 해도 보통은 디노와 브래드가 겹치지 않게 본가에 다녀왔기 때문에, 그 둘 외에 변변한 친구가 없었던 키스는 기숙사를 나가는 친구를 혼자서 배웅해본 적이 없었다.


  시간은 벌써 밤 열 시가 넘어 있었다. 디노가 종종 늦게까지 깨어있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만약 아침에 출발하는 리니어를 탄다면 일찍 준비를 마치고 잠들었을지도 몰랐다. 키스는 자신의 무심함에 한탄하며 머리를 털던 수건을 널어두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평소라면 디노가 먼저 자길 배웅해달라며 떠나기 전날에 피자를 잔뜩 주문했을 것이고, 그걸 먹으면서 함께 밤을 새웠을 텐데, 시간조차 알려주지를 않았다. 그렇다고 물어보지도 않고 가만히 있던 사람에게도 잘못은 있었다. 연락을 해보는 편이 좋겠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키스가 휴대폰을 찾던 때였다.

“키스! 잠깐 괜찮아?”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문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키스의 이름을 불렀다. 키스는 속마음을 들킨 사람처럼 어깨를 움츠렸다. 키스의 룸메이트가 방학을 맞이해 기숙사를 잠시 나갔다는 걸 디노도 알고 있었는지, 밤인데도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키스는 재빨리 문을 열어주었다.

“이 시간에 웬일이야?”

타이밍 좋게 들린 디노의 목소리가 사실은 무척 기꺼웠지만, 키스는 태연하게 반응했다. 그런데도 목소리에서 묻어나는 은근한 반가움을 단번에 잡아낸 디노는 기운차게 대답했다.

“이 시간이니까 부른 거야.”
“뭐 하게?”
“옥상에 가자.”

디노는 키스의 손을 덥석 잡았다. 디노도 금방 샤워를 했는지 디노가 가까이 다가온 순간 허브 섞인 과일 향이 훅 끼쳤다. 디노가 즐겨 쓰는 바디워시 냄새였다. 답지않게 체온이 살짝 내려간 손이 기분 좋게 맞닿았다. 갑작스러운 제안에 키스는 굳이 옥상까지 걸음을 옮겨야 하는 까닭을 물었다.

“내가 없는 동안 키스가 외로울까 봐.”
“누가 외로워한다고…….”

키스의 의문을 충족시키는 답변은 아니었다. 대화가 제대로 맞물리지 않고 있음을 눈치챈 키스는 혼잣말처럼 구시렁대면서도 체념하고 디노의 손에 끌려가는 쪽을 선택했다. 분명한 목적을 갖고 애원하는 디노의 부탁을 뿌리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키스는 그 제안을 강하게 거절할 의지도 없었고, 마침 디노에게 할 말도 있었으니 슬리퍼를 질질 끌며 밖으로 나왔다.

키스가 문을 닫고 잠자코 따라와 주는 모습을 확인한 디노는 보는 사람까지 산뜻해질 정도로 환하게 웃으면서 키스의 손을 놓아주었다. 디노가 힘을 빼자마자 놓쳐버린 손을, 키스는 다시 맞잡을 용기가 없었다.




디노는 앞장서서 옥상 출입구를 열었다. 낮의 열기를 완전히 덜어내지 못하고 눅눅함을 머금은 바람은 여름이라는 사실을 잠깐 잊을 정도로 상쾌했다. 후텁지근한 여름 밤바람이 이토록 개운할 수 있을까. 디노는 눈을 감은 채로 팔을 벌려서 있는 힘껏 밤공기를 끌어안았다.

“여기는 도심이라 시골에 비하면 별이 많이 보이진 않지만.”

마음 한구석이 허전할 땐 별을 보면 기분이 나아져. 그걸 키스한테 말해주고 싶었어. 디노는 말을 마치더니 천천히 바닥에 드러누워 자기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키스는 그런 디노를 당혹스럽게 쳐다보며 몇 마디 핀잔을 주었다.

“방금 샤워해놓고 바닥에 드러눕는 거냐고.”
“하하, 샤워는 다시 해도… 어? 어떻게 알았어?”
“…….”

네가 내 손을 잡았을 때 좋은 향이 끼쳐서 알았다는 얘기를 입 밖으로 꺼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키스는 입을 다물고 괜히 옥상 아래에 시선을 주었다. 발 밑으로 펼쳐진 인공적인 도심의 불빛이 저마다 다른 방향으로 바쁘게 움직였다. 눈이 따끔거릴 정도로 밝은 야경에서 눈을 떼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자 처음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자리에 하나둘 애처로운 반짝임이 보였다. 야경에 지지 않을 정도로 근사하게 새겨진 별들이, 필사적으로 몸을 태우고 있었다. 마침 밤하늘이 맑았다. 키스는 디노 옆에 자리를 잡아 자기 팔을 베고 누웠다.

마음이 허할 때 올라오는 곳이라. 키스는 디노가 외로운 얼굴을 하고 홀로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모습을 상상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외로운 날이 있다. 그것은 불시에 덮쳐오는 파도 같은 것이라 특정한 원인이 있어 찾아오기도 했고, 별다른 이유가 없이 찾아올 수도 있었다. 물론 디노에게도 남들과 다를 바 없이 그런 나날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너도 외로움을 탈 때가 있느냐고 장난스레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놀라울 정도로 당연한 이야기였지만, 키스는 외로워하는 디노의 모습을 떠올리기 어려웠다.

“키스는 사라진 기억이 어디로 간다고 생각해?”

키스가 짧게 생각에 잠긴 사이에 디노는 새로운 주제를 들고 와 이야기를 시작했다. 공상 같기도 하고, 철학 같기도 한 질문이었다. 키스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돌려 옆에 누운 디노를 바라보았다. 별을 바라보고 있는 디노의 옆얼굴은 여전히 평소의 디노였다. 그렇게 보이려고 애쓰는 것도 같았다.

키스도 와 본 적이 있으니 알겠지만, 디노는 추억을 쓰다듬듯이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자기가 살던 곳은 굉장히 시골이라 밤이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별이 쏟아지곤 했다고. 그래서 날이 맑으면 조부모님과 함께 집 밖으로 나와서 별을 올려다보곤 했다고 한다. 그랬다. 디노에게는 화려한 야경보다는 별이 총총 박힌 밤하늘이 익숙할 터였다.

사라진 것들은 전부 별이 된다. 디노는 그런 이야기를 할아버지한테 들었다고 말했다. 동화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였지만 할아버지가 해주신 말씀은 철썩같이 믿는다는 디노가 아니던가. 디노는 꿈을 꾸듯이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러니까 잃어버린 기억도 본래 있어야 할 자리에 돌아간 것뿐이지 사라진 건 아니래.”

  디노는 어린 시절 별을 올려다보면서 방대한 시간의 상실로 인한 공허함을 메꿔왔다는 이야기까지는 털어놓을 수 없었다. 몇 년간 숨겨온 과거가 다시금 디노의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에리오스에 입소하기 전에 받아야 할 중요한 검사가 남아있어 여름방학을 함께 보내지 못한다는 사실도, 끝내 얘기할 수 없었다.

잃은 것들로 인해 뚫린 구멍은 쉽게 메워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마음이 허하면 잃은 것들을 다시 만나러 오면 된다고 디노는 말했다. 키스는 디노가 하는 이야기를 반은 이해할 수 있었고, 반은 이해할 수 없었다. 평소와 같았더라면 '너 정말로 러브 앤드 피스 성인이었던 거냐.' 라고 농담이라도 던졌을 것이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디노는 '기껏 좋은 얘기를 하고 있었는데!' 라면서 서운한 티를 냈을 것이다. 그렇게 대화가 흘러가야 했다. 그래, 평소와 같았더라면.

그러나 키스는 대꾸하는 것도 잊고 디노의 추억담에 귀를 기울였다. 언제나와 같았던 디노의 표정이 균형을 잃은 것처럼 서서히 슬픔에 젖어 무너져가고 있었다. 봐서는 안 되는 얼굴을 본 것 같았다. 키스는 다시 별을 올려다보았다. 디노가 안고 있는 외로움이 무엇인지 가늠할 수도 없었다. 키스 역시 종종 고독을 느꼈다. 쓸쓸한 날들이 있었다. 그러나 디노가 품은 감정은 자신의 것과 종류가 달랐다. 키스는 그 순간만큼은 디노가 은하만큼 멀게 느껴졌다. 마치 다른 별에서 태어난 사람인 것처럼.

“미안해, 키스.”
“……뭐가?”

영문도 모르고 말없이 디노의 이야기를 듣던 키스가 다시 디노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디노의 얼굴이 한층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처음 누웠던 자리보다 훨씬 가까운 거리에서 디노 역시 키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축축한 여름 냄새가 뺨을 간질이고, 바람은 등이라도 밀어주듯 뒤에서 부드럽게 불었다. 옥상에 듬성듬성 놓인 화분에 붙은 풀벌레 울음소리가 들렸다. 모든 감각이 순간 극도로 예민해졌다가, 촛불이 꺼지듯 아득해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키스는 온 세상이 입을 다문 듯한 착각에 빠졌다. 넓은 우주에 둘만 남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디노의 눈동자가 별을 담근 호수처럼 일렁였다. 그 심연에는 말로는 다 표현하지 못할 망설임과 죄책감이 담겨있었다. 이마가 닿을 듯 말 듯 한 거리에서 디노는 한참 키스의 눈을 응시했다. 키스의 눈에서 별을 찾으려는 것처럼. 키스는 뒤로 물러날 수도 다가갈 수도 없었다. 높은 습도에 젖은 숨결마저 생생히 닿는 거리에서 서로를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디노는 이내 감정을 삭이려는 듯이 먼저 고개를 돌렸다. 키스는 사라졌던 감각이 차차 돌아오고 있음을 느꼈다. 멀어졌던 벌레 소리가 서서히 크게 들렸다. 저도 모르게 고개에 힘을 주고 있었는지, 뒷목에 뻣뻣하고 저릿한 감각이 뒤늦게 내달렸다.

“그러니까 내가 없는 동안 외로우면 여기 올라와서 별을 봐.”


한순간 얼굴이 아주 가까이 다가왔던 것 외에 두 사람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디노는 몸을 일으켜 앉아서 키스를 내려다보며 수줍게 웃었다. 키스의 물음에는 끝내 대답을 하지 않은 채.





*




  그 뒤로 어쨌더라? 술기운이 퍼지기 시작했는지 기억이 뒤죽박죽 섞였다. 키스는 옥상 난간에 팔을 올리고 이마를 짚었다. 그 뒤로는…… 방 앞에서 헤어지기 직전에 우연히 떠오른 척 디노에게 떠나는 시간을 물었던 것 같다. 디노가 떠나는 당일, 방학이 끝나면 다시 돌아올 텐데도 뭐가 그리 아쉬운지 계속 뒤를 돌아보는 디노에게 얼른 가라는 듯이 손을 휘휘 저었던 기억이 흐릿하게 남아 있었다.

사라진 것들이 돌아가는 곳.


키스는 빈 맥주캔을 구겨서 발밑에 내려두고 담배를 한 모금 들이마셨다. 아카데미 건물의 옥상보다 에리오스 타워의 옥상이 훨씬 높은데도 별은 여전히, 한없이 멀었다.

그렇게 스물네 살의 키스는 그때를 회상하며 열여덟 살의 디노처럼 밤하늘에서 사라진 것들의 흔적을 더듬었다.

다시 한번 디노가 없는 여름을 뛰어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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