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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노키스] 시간의 교차점

알잉뽀 2021. 7. 12. 23:50




     스물세 살의 디노는 때때로 시간의 교차점을 횡단했던 열여덟 살의 여름을 떠올리곤 한다.



*



     디노는 덜컹거리는 창가에 머리를 기댔다. 어둠이 내려앉아 한적한 거리가, 리니어가 나아가는 방향과는 반대쪽으로 휙휙 지나쳐갔다.

     좌석 위에 위치한 짐칸에는 짐이 한가득 실려 있었다. 전부 디노가 들고 내릴 몫이었다. 기숙사로 돌아오는 길에 친구들에게 나눠줄 선물을 양팔 가득 들고 오는 것은 매년 있는 일이었고, 정신을 차리고 보면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부피가 되어 있는 것도 예년과 같았다. 다만, 이례적으로 방학 내내 자리를 비웠던 이번 귀가 선물에 특히나 힘을 준 것 또한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올해는 시골에 다녀왔던 게 아니기 때문에 할머니가 구워주신 쿠키도 가져오지 못했으니까. 그렇다고 오랫동안 부재였는데 빈손으로 돌아가자니 되레 의문을 살 것 같아 결국 역에서 불필요할 정도로 짐을 늘리고 말았다. 디노는 벌써 키스의 걱정스러운 시선과 브래드의 쓴웃음을 떠올리고는 상상 속의 그들과 마주 보듯이 멋쩍게 웃었다.

     밤은 조용히 사람을 덮친다. 입을 다물어버리면 세상에 홀로 남은 듯이 고요해지는 시간. 디노는 청각을 곤두세우려는 듯이 눈을 감았다. 다행스럽게도 리니어 내부는 엔진이 작동하는 소리와 드문드문 앉은 탑승객의 말소리로 마냥 조용하지는 않았다. 창가에 대고 있던 오른쪽 이마가 차가워지고 있었다. 관자놀이를 타고 전해지는 엔진의 진동에 두개골까지 달달 떨리는 것 같았다.

     디노는 등받이에 머리를 기대어 자세를 고쳐 앉았다. 편한 자세로 고개의 힘을 풀자마자 피로가 쏟아졌다. 가장 빠르게 돌아가려면 마지막으로 운행하는 리니어가 최선이었으니까. 디노는 스스로를 다독이듯이 말했다. 벌써 자정이 넘은 시간이었다. 기숙사에 도착하면 새벽일 테지만, 하루빨리 연구실 침대에서 벗어나 기숙사 침대에 누울 수만 있다면 이 정도의 수고로움은 감내할만 했다.

     잠시 눈을 붙일까. 한 번 자려고 마음을 먹으니 금세 정신이 몽롱해졌다. 완전히 잠이 들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정신이 차츰 멀어지고 손발에 힘이 빠지는 것이 느껴졌다. 머릿속에서 탁구공이라도 통통 튀어 다니는 것처럼 약한 두통이 일었고, 몸이 붕 뜨는 기분이 들었다. 평소에는 잘 하지도 않는 멀미가 날 것 같았다.




     “지금 갈게, 디노.”



     졸고 있던 디노를 깨운 것은 키스의 목소리였다. 귀를 통해서가 아니라, 고막을 통해 직접 뇌리를 스친 듯한 목소리. 아직 깊게 잠들지 않았기 때문에 꿈결에 들은 환청인지도 몰랐다. 그런데도 디노는 그 목소리에 이끌리듯 번쩍 눈을 떴다.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어?”



     시야에 불쑥 밤하늘이 들어찼다. 분명 켜져 있던 객실 내부의 전등은 모두 꺼져 있었다. 다만 달빛 별빛이 창을 타고 들어와 파도처럼 퍼져 객실을 밝게 비추고 있었다.

     디노는 그 광경에 경외마저 느꼈다. 자연광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선명하고 밝았으며, 천장과 벽을 빼곡히 채운 것은 밤하늘에서는 찾아본 적 없는 이름 모를 성좌뿐이었다. 비유하자면 밤하늘이라기보다는, 은하를 테마로 만들어진 플라네타리움 같았다. 그러나 인공적으로 만들어낸 빛이라고 하기에는, 넋을 잃을 정도로 웅대하고 찬란했다.

     체감상 눈을 감고 있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는데,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거지? 불현듯 바뀌어버린 객실 내부에 아연한 표정으로 입을 벌리고 있던 디노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훌훌 젓고 가방에 넣어 두었던 휴대폰을 찾았으나, 아무리 액정을 두드려봐도 휴대폰은 전원이 꺼진 것처럼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계속해서 엔진이 돌아가는 소리가 나고 있었기 때문에 디노는 리니어가 여전히 달리고 있으리라 추측했다. 그러나 창밖으로는 캄캄한 밤하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없어 어디를 달리고 있는지를 가늠할 수가 없었다. 그리 많지 않았던 승객들조차 모두 사라져 있었다. 아름다운 광경에 감탄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디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통로 쪽으로 나오는 도중에, 이 객실에서 디노를 제외한 유일한 승객일 터인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키스?”



     서 있는 폼과 멀찍이 보이는 인상을 토대로 추측한 이름을 입 밖으로 꺼내긴 했으나 그는 디노가 알던 키스와는 적잖이 다른 모습이었다. 얼핏 보기에 키도 훨씬 크고 체격도 좋아 보였다. 검은 후드를 뒤집어쓴 그는 디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천천히 후드를 내려 얼굴을 드러냈다. 인상을 쓰고 있는 건지, 앞머리로 가려지지 않은 쪽 눈이 약간 일그러졌다. 디노와 시선을 나누는 몇 초 동안 수천 가지의 감정이 그의 얼굴을 엇갈려갔다. 필사적으로 무언가를 갈구하는 사람의 눈빛이었다. 그 눈빛에는 디노가 아는 것 이상의 고난과 세월이 녹아 있었다. 키스 혼자서 어른이 된 것 같았다.

     내가 아는 키스는 이런 얼굴을 하지 않아. 디노는 살짝 뒤로 물러섰다. 그렇다고 사람을 착각한 것 같지도 않았다. 디노가 한 걸음 물러선 것보다 큰 보폭으로 성큼성큼, 그가 고개를 떨구고 다가왔다. 누구냐고 먼저 물어야 하는데, 이미 답을 알고 있는 것 같아 좀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대로 그를 두고 도망칠 수도 없었다. 디노는 다시 한번 물었다.

     “저기, 죄송해요. 키스, 맞아?”
     “……디노.”

     그는 대답 대신 디노의 이름을 부르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빛에도, 목소리에도, 디노가 알던 것보다 무거운 시간이 묻어났지만 디노는 그 대답으로 그가 키스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디노는 키스가 상황을 설명해주길 바라며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키스는 말을 잇는 대신 디노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은은한 술과 담배 냄새가 키스의 체향을 타고 디노에게 넘어왔다.

     맞닿은 가슴으로 키스의 심장이 미약하게 고동쳤다. 디노는 어정쩡한 자세로 가만히 서 있었다. 먼저 말을 꺼내려고 해도 무엇부터 물어야 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디노가 감정을 추스르는 동안, 키스는 어깨를 떨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가 슬픔에 젖어있다는 사실만큼은 처절하리만치 전해졌다.

     디노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손을 들어 올려 조심스레 키스의 등을 쓸어내렸다. 키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때문에 그 이상의 것을 해줄 수도 없었다. 디노는 그렇게 자기보다 훌쩍 큰 키스를 한참 다독였다. 떨림이 잦아들어 다시 고개를 들어줄 때까지.

     “디노, 나는……”

     이윽고 키스가 어렵사리 얼굴을 든 순간, 눈 부신 빛이 디노를 덮쳤다. 디노는 반사적으로 눈을 꽉 감았다. 키스가 무슨 말을 하려는 듯이 입을 열었어도 그의 마지막 말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저 지금 키스를 놓치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그를 감싸 안은 팔에 힘을 주었지만,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할 때와 마찬가지로 서서히 힘이 풀린 팔은 스르륵 내려가고 말았다.

     디노는 팔을 허우적대며 가까스로 키스의 손을 잡았다. 아주 잠시 키스가 힘을 주어 맞잡는 것이 느껴졌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손끝에조차 힘이 들어가지 않게 되어 결국 허망하게 서로의 손을 놓치고 말았다.



     눈을 떴을 때, 키스는 이미 사라져 있었고, 디노는 여전히 좌석에 머리를 기댄 채 앉아 있었다. 디노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들고 가방에 손을 뻗어 휴대폰을 잡았다. 잠들기 전에 확인했던 시간에서 단 20분밖에 흐르지 않았다.

     늦은 시간인데, 그 사이에 키스에게서 연락이 와 있었다.

     [밤에 온다더니 아직이야?]

     그러고 보니 갖고 돌아갈 선물은 가득 챙겼으면서, 정신이 없어 먼저 연락한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키스에게서 먼저 연락이 오는 것은 무척 드문 일이었으므로 디노는 자연스레 웃음이 났다. 매일 얼굴을 마주하다가 한 달 가까이 못 만났으니 그럴 만도 한가.

     [30분 정도 남았어!!]
     [지금 갈게, 키스]

     역시 아무 일도 없었구나. 디노는 재빠르게 답장을 전송하고 다시 눈을 감았다.
     어깨에 미미하게 스민 키스의 체향에 도로 잠이 들 수는 없었어도.



*



     “그때 만났던 건 진짜 키스였을까?”
     “내가 어떻게 알아.”
     “진짜 키스였다면 키스가 알 테니까.”

     옥상에 올라온 지 제법 시간이 지나자 그새 땀이 났는지 뺨이 따끔거렸다. 디노는 난간에 기댔던 몸을 일으켜 손바닥으로 부채질을 했다. 계절 끝 무렵이 이렇게 더울 일인가.

     디노는 아직도 여름밤마다 아카데미 시절 마지막 여름방학을 떠올렸으며, 그때마다 빠짐없이 키스에게 그날 봤던 리니어 내부의 광경을 묘사했다. 같은 얘기를 몇 해째 듣고 있는 키스는 여전히 디노의 이야기를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담배의 마지막 한 모금을 빨아들였다. 디노가 영문 모를 소리를 하는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으니 딴지를 걸기도 귀찮은 모양새였다. 디노 역시 그런 키스의 반응이 익숙하다는 듯이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근데 생각해 보면 그렇지. 키스는 술도 안 마시고.”

     그때 만난 키스한테서는 술 냄새가 났었으니까. 디노가 중얼거리는 걸 듣고 키스는 입에서 담배를 떼었다.

     “나 내려간다.”
     “앗, 같이 가!”

     현실이 아니라면 차라리 다행이라고 속 편하게 넘기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만약 정말로 먼 미래에서 키스가 나를 만나러 와준 거라면, 만약 한순간 기적적으로 우리의 시간이 섞였던 거라면.

 

 


     그래서 스물세 살의 디노는 매해 여름, 시간의 교차점을 횡단했던 열여덟 살의 이야기를 되풀이하곤 했다. 시간을 넘어 자기를 만나러 와준 키스의 모습을, 미래의 키스와 다시 만날 때까지 기억하기 위해서.
















칠석의 디노키스라는 느낌으로 구상했던 글이에요.
글의 시점은 여름방학 끝나갈 무렵이라 7월은 아니고 견우와 직녀 설화도 저쪽 세계관에는 없을 테니 딱히 그런 언급도 넣지 않았지만요.
그래도 하룻밤만의 만남이라는 느낌으로.

▼글을 다 읽은 후에 한 번 들어보시면 좋은 곡… 호시아이 (링크는 제가 좋아하는 라온님 커버)
https://youtu.be/QA9o7ybT4n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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