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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노키스] 잠 못 이루는 너에게

알잉뽀 2021. 8. 26. 16:12






옛날옛날, 너구리 담배 피우던 시절에 분홍 늑대가 살았어요.
늑대는 나쁜 꿈을 자주 꾸었기 때문에 밤에 잠드는 게 무서웠답니다.
그래서 늑대는 자는 것을 미루다가 늦게 잠들곤 했지요.

그러던 어느 날, 늑대는 늦은 밤에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들었어요.
밤은 늘 벌레 우는 소리 외에는 아주 고요했기 때문에 늑대는 조금 겁이 났답니다.
늑대는 잠시 고민했어요.
지금 억지로 잠을 자봐야 가위에 눌릴 것 같았고, 그렇다고 혼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의 정체를 밝히러 가기에는 무서웠거든요.

기나긴 저울질 끝에, 늑대는 잠시 굴 바깥을 살펴보기로 했어요.
귀신이면 어떡하지? 늦게까지 깨어있는 나를 혼내주러 온 거면 어떡하지?
늑대는 조심스럽게 굴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어요.


그랬더니 이게 웬걸!
굴 바깥에 있는 건, 귀신이 아니라 밤 산책을 하던 너구리였습니다.

너구리를 본 늑대는 깜짝 놀랐어요.
늑대를 본 너구리도 깜짝 놀랐습니다.
늑대가 자기를 잡아먹을 거라고 생각한 거죠.
늑대는 다급히 해명했어요.

"잠깐! 나는 너를 잡아먹지 않아. 나는 피자만 먹어!"

맞아요. 분홍 늑대는 인간 할아버지 할머니 손에 컸기 때문에 피자를 먹고 산답니다.
동물 친구들을 잡아먹지 않아요.
아직도 낮에는 종종 피자를 받으러 가곤 한답니다.
너구리는 맥이 빠진 얼굴을 했어요.
늑대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에, 순식간에 긴장이 풀렸거든요.

너구리가 도망가지 않고 멈춰선 틈에 늑대는 너구리에게 물었어요.

"이렇게 늦은 밤인데 너구리는 왜 잠을 안 자?"

너구리는 어이없다는 듯이 대답했어요.

"너구리는 야행성이야. 늑대도 야행성이잖아?"
"그래!?"

늑대는 매우 놀랐습니다.
새끼 때부터 조부모님 손에 자랐기 때문에, 자기가 야행성인 줄도 모르고 큰 거예요.

"나는 밤에 돌아다니지 않는데…."
"낮에 사냥하러 다니는 늑대도 있다고 하니까 그럴 수는 있지."

그렇답니다! 늑대는 보통 야행성이지만, 사냥을 위해 낮에 활동하기도 한다고 하지요.
늑대는 너구리의 말 덕분에 늦게 자는 것에 대한 죄책감을 덜 수 있었습니다.
자기가 야행성 동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까요.

"그럼 너구리는 이렇게 어두울 때 뭘 해?"

늑대는 눈을 반짝이면서 너구리의 대답을 재촉했어요.
너구리는 머쓱한 얼굴로 말했습니다.

"나? 그냥 적당히 어슬렁거리면서 나무 열매도 주워 먹고, 산책도 하고…."

정말 그게 전부였어요. 밤의 세상이라고 크게 다를 것은 없었어요.
하지만 늑대에게는 너구리가 들려주는 밤 산책 이야기가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늑대는 밤에 굴 밖을 나가본 적이 없었거든요.
늑대는 큰 결심을 한 듯이, 하지만 무언가 떨쳐낸 듯이 개운한 얼굴로 너구리에게 말했습니다.

"그럼 너구리야, 나도 너랑 같이 산책을 해도 될까?"

늑대는 기대에 찬 눈으로 꼬리까지 붕붕 흔들고 있었습니다.

"너 밤에 잔다며."
"응…. 그런데 요즘은 무서운 꿈을 자주 꿔서 잘 못 자."

그 얘기를 들은 너구리는 잠시 생각에 잠겼어요.

"...알겠어. 그럼 가자."

너구리가 승낙하자 늑대는 조심스럽게 굴 밖으로 발을 내밀었어요.
밤에 밟는 흙은 생각보다 더 축축하고 차가웠습니다.
하지만 혼자가 아니니까 두렵지 않았어요.
늑대는 조금 무서운 기분이 들 때마다 앞서가는 너구리가 남긴 작은 발자국을 보며 남몰래 웃었습니다.

"너구리야, 우리 어디 가?"
"가보면 알아."

늑대보다 한참 작은 몸인데도 너구리는 밤길이 익숙하다는 듯이 씩씩하게 걸었습니다.
그 뒷모습을 보고 있자면, 늑대도 당당하게 밤을 만끽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늑대는 그렇게 너구리와 함께 평소에는 가지 않는 길을 넘어, 수풀을 헤쳐갔습니다.
큰 덩치로 지나가기 어려운 길도 가까스로 몸을 구겨 조심스레 지나갔고요.
그렇게 한참을 걸어, 드디어 너구리가 걸음을 멈추더니 말했습니다.

"잠깐 눈 감아 봐."
"나 두고 가는 거 아니지?"
"아니니까 감아 봐."

늑대는 너구리를 믿고 순순히 눈을 감았습니다.

"이제 왼쪽으로 돌아서 열 발자국 앞으로 가."
"하나, 둘…."

늑대는 너구리가 말한 대로 눈을 감은 채 조심조심 걸음을 옮겼습니다.

"됐어, 이제 떠도 돼."

늑대는 너구리의 말에 천천히 눈을 떴습니다.
그리고 눈 앞에 펼쳐진 풍경에 깜짝 놀랐어요.

시야를 가득 채운 달맞이꽃들이, 달빛을 받아 예쁜 노란색으로 빛나고 있었으니까요.

밤이 이렇게 환할 수가 있을까요? 꽃밭은 끝이 보이질 않았습니다.
그 장대한 풍경이, 마치 둘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밤의 세상을 비추고 있었어요.
늑대는 그만 말조차 잊고 달빛으로 빛나는 꽃밭을 조용히 눈에 담았습니다.

"밤 산책도 나쁘지 않지?"
"응…."

너구리의 물음에 늑대는 감격한 목소리로 고개를 끄덕였어요.
어둡고 무서운 줄로만 알았던 밤에 이렇게 아름다운 만남이 있을 줄 몰랐으니까요.
늑대는 영원히 이 밤을 잊지 못할 거예요.

그 후로 늑대는 밤마다 너구리와 함께 산책을 나섰답니다.
밤이 무섭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나쁜 꿈도 꾸지 않게 되었어요.

악몽 대신, 늑대는 때때로 그날 너구리와 함께 봤던 노란 꽃밭의 꿈을 꾸게 되었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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